高度의 經濟成長으로 인하여 韓國은 亞細亞의 有望株로 알려지고 都市는 近代化로 高層「빌딩」이 치솟아가고 있다.
이 高度成長의 물결을 따라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잘 살아보자!』는 욕망이 일어나고 특히 女性들에게는 남에게 못지않게 잘살아야겠다는 욕망이 올빼미 눈처럼 빛나고 있다.
바람직한 現象이긴 하지만 너무나 지나친 消費性向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탓하지 아니치 못할 点도 있다.
그러나 잘살아야겠다는 부푼 慾望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現實에 접하고서 나는 때때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본다.
- 敎會도 잘살아 볼 수 없을까?
나의 눈에 비친 敎會의 살림살이는 너무나 가난하다. 敎會에 대한 나의 知識이 빈약한 탓으로 「가난하다」고 結論을 내리고 있는지는 모르나,
敎會는 가난하다. 信者들의 애긍, 혹은 독지가의 희사 등을 主로하여 가지고 敎會經營을 해나가는 것으로 안다.
옛적에는 敎會가 많은 土地를 가지고 있었으나 土地改革 이후 그 資金을 병원 등 社會事業施設에 投資했다는 消息을 들었을뿐 別로 收益性이 있는 것으로는 알지 못하고 있다.
地主의 沒落과 別로 다를바 없는 財政형편으로 敎會는 변모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主日미사때 신부가 직접 애금통을 들고 信者들에게 내민다. 信者들에게 고무는 되겠지만 별로 收入이 많다고는 볼 수 없다.
- 가난한 敎會 -
- 敎會는 가난해야만 되는 건가?
일종의 疑問符가 머리에 떠오른다.
『아니다 敎會도 잘살아야한다』
이렇게 結論을 지으면서 다음과 같은 理由를 주저치 않고 들어본다.
사람의 발은 땅을 딛고 있으며 머리는 하늘을 向하고 있다. 敎會도 그 設立目的은 形而上學的인 것이나 어디까지나 現世에 발을 딛고 있으니 現實을 무시할 수는 없다.
現實에서 살자면 經濟를 無視할 수 없으니 「오라·옛·라보라」라는 그리스도의 聖訓도 있지 않은가 敎會도 가난에서 벗어나야만 教會의 使命을 다하는데 퍽 도움이되리라고 생각한다. 敎會도 잘 살아야만 前近代的 敎會經營方式을 拂式하고서 애긍통 같은 것을 들고 다니지 않을 수 있지 않겠는가.
『가난한 이는 진복자로다』라는 그리스도의 말도 있지만 그것은 敎會가 가난해야한다는 뜻이라기보다 貧富는 그 物質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즉 마음의 자세에 있다고. 敎會가 부유한 財政力을 가지고 敎會가 해야 할 事業을 해야하지 않겠는가. 敎會의 活動半徑이 넓어지면 넓어지는 만큼 이 世上에 敎會設立의 目的이 가까워지며 天堂도 따라서 가까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앞으로는 敎會에서도 經濟學者가 나오고 經營學敎授도 나와 敎會經營의 참신한 領域을 開拓해준다면 한국가톨릭敎會운영에 새로운 轉機가 되지 않을까 한다.
가톨릭敎會에는 많은 神學者와 哲學家가 있다. 그러나 다만 敎會經營의 學者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다. 敎會의 살림살이가 가난에서 벗어나야 할 때도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金基永(每日經濟新聞編輯局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