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빠르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 누구나 그럴때가 많을 것이다. 자라나는 애들을 볼때 世代가 바뀌어져 나아가는 것을 볼때 더욱 그럴 것이다.
나도 세월의 흐름에 신경을 쓸 나이가 된 탓인가. 과거와 두드러지게 다른 것은 세월에 대해 신경을 쓰게되는 점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아쉬워지는 것은 時間인듯 하다. 시간의 빠름과 짧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전에는 누가 세월이 빠름을 이야기할 때 實感있게 듣지 않았다. 지금은 共感이 가는 것이다.
『光陰如流』라고 한다. 『光陰如矢』라고도 한다. 그전에는 이말에 現實感覺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그런정도로 무관심했다. 이제 세월은 흐르는 물같이 화살같이 느껴지게 된 것이다.
한일 없이 세월을 보냈다는 느낌이 들때가 많다. 문자 그대로 虛送歲月의 느낌이 들때가 있다.
이래 저래 하루하루 보내다보니 1년이 잠깐이다. 무엇을 해놓았는가를 생각할때 안타까운 생각이 들뿐이다. 그럴수록 뜻깊은 무엇을 해야하겠다는 생각이 부쩍 든다. 그러나 막상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할때 對答이 나오지 않는다.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는 古今東西를 막론하고 가장 深遠한 질문이었다. 이는 哲學이나 神學의 모든 體系에서 항상 中心的인 문제였다. 2천년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것이 나에게 쉽게 풀려질 까닭은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未來學은 앞으로 30년 또는 50년을 내다본다. 그때의 人間의 姿態며 세계의 변화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의 한 질문을 쉽게 풀 수는 없을 것이다. 人生을 草露에 비유한 사람이 있다. 부귀영화를 一場春夢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덧없이 시가만을 보낸다는 허망한 느낌은 나에게도 例外가 될 수 없다. 職業이 있어도 일다운 일을 한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을 해서 무엇하나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그저 생활을 위해 기계적인 생활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고작이다. 虛無와 적막을 모르는 사람, 不安과 초조를 모르는 사람은 행복하자. 즉 마음이 가벼운 사람은 행복하다. 마음이 가벼운 것은 건강에도 좋다고 한다. 마음을 가볍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그야말로 「深遠한 질문」을 풀 수 있는 곳은 어디가 될 것인가. 자꾸 생각해 보아야 별 도리는 없는 것이다. 결국 그것이 있다면 고개숙여 경건히 기구할 때가 아닐까. 그래서 기구하는 敎人은 어차피 행복하다고 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끝>
(이번으로 지금까지 이 欄을 맡아 執筆해 주신 梁興模씨는 끝나고 다음 1回를 쉰다음 서울 家庭法院長 姜安熙 判事가 10回에 걸쳐 쓰게됐읍니다. )
梁興模(中央日報 論說委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