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慶尙道의 가랑잎」이라는 詩集을 낸 일이 있다. 물론 慶尙道는 경상남북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행정적인 지역을 구분하는 명칭이다. 하지만 그곳이 고향인 내게는 그것은 단순하게 지역적인 명칭일 수만 없다.
무둑뚝하면서도 다정하고 소박하면서도 은근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그런 의미에서 경상도의 가랑잎은 소박하고 은근한 세계에 지는 가랑잎일 수도 있다. 혹은 全羅道의 가랑잎과는 다르게 경상도 말씨처럼 투박스럽게 떨어지는 가랑잎일 수 있다. 그런 뜻에서 경상도의 가랑잎은 왁살스러운 경상도 사투리가 환기시켜주는 「이미지」로서 가랑잎이 지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혹은 경상도라면 경주의 유서 깊은 고적이나 해인사(海印寺)나 통도사(通道寺)나 혹은 줄기찬 태백산(太白山)을 연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경상도의 가랑잎은 경주의 유서 깊은 고적이나 해묵은 사찰이나 태백산의 깊은 골짜기에 지는 가랑잎일 수도 있는 것이다.
더구나 나 자신의 개인적인 것으로서는 경상도라면 잊혀지지 않는 인연이 맺어지고 풀린 곳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인간의 오묘한 인연이 맺어지고 풀려지는 세계에지는 가랑잎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언어(言語)를 우리들의 체험에서 받아들이고 그것을 다루게 되는 것이 창조자로서 시인이 언어를 다루는 태도이며 그와 같은 태도에서만 언어는 풍부한 상징적인 세계를 간직하고 끝없이 신비스럽고 오묘한 것일 수 있다. 그 「慶尙道의 가랑잎」속에 「더덕순」이라는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어느날
내 머리에 더덕순이 돋아났다.
허풍치지 말라.
사람 머리에 더덕수이
돋아날 수 있느냐.
지당한 말씀.
하지만 내 머리에 돋아난 더덕순도 엄연한 사실이다.
돼 먹잖은 소리.
따지고 보면 속이 상한건
자네가 아니고 나다.
純眞한 바보.
더덕순은 귓구멍으로 벋어 나와
남의 말귀를 짐작하지 못하고
눈으로 뻗어나와
모든 사람이 안전한
초록빛으로 보이고
이것은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코에서
더덕 냄새가 풍기고
틀림없이 이것은
氣候 탓이다.
아니면 水質탓일까
아니면 天性일까
제길 昌慶苑으로라도 가야겠다.
植物關에서
하다못해 遺傳에 대한
새로운 硏究資料라도 제공되어야 겠다.
어리석은 種子와
어리석지 않는 種子의 區別에 關한.
이것이 졸작(拙作)( 「더덕순」의 전문(全文)이다. 내용이 너무나 평명(平明)하기 때문에 설명을 붙일 여지도 없을 것이다. 나 자신의 식물성적(植物性的)인 순박성에 대한 자조적인 감정을 노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내가 반드시 「어리석은 種子」라는 뜻이 아니다. 참으로 참되고 순직한 것일수록 동물적인 혼탁한 정열이나 핏기어린 눈망울을 정화(淨化)시켜, 발랄한 생기와 안존한 인내(忍耐) 속에서 어리석음을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더덕순」은 식물성적인 순박성에 대한 자조적(自조的)인 것이기 보다 식물적(植物的)인 내명성(內明性)을 갈구하는 나의 안타까운 호소(呼訴)라는 것이 더욱 적합할 것이다. 영악하게 영리하기 보다는 밝게 어리석은 자(者)의 귓구멍으로 더덕순이 때로 뻗어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朴木月(詩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