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0월초부터 世界主敎代議員會議가 去年 2월 23일 敎皇 바오로 6世의 召集發表로서 「로마」에서 열리게 된다. 敎皇께서는 그 召集發表에서 『로마 聖廳과 各國主敎團間의 보다나은 協同과 보다 效果的인 相互關係를 다룰 것』이라고 그 主題를 明示한바있고 今年正月 「옷세르바또레 로마노」紙 亦是 같은 内容文을 내면서 「로마」 聖廳과 各國主敎團間의 法的 關係規定도 討醸될 것이라고 한바 있다. 그밖에 이번에 主敎代議員會準備委員會가 起草한 議案內容의 骨子는 두차례 本紙에 紹介된바와같다.
第1次 「시노드」以後 解決을 보지 못했던 여러 문제들이 敎會안에서 날로 深刻해져가고 있고 또 새로 發生한 問題点들이 緊迫한 解決을 보기위해서 이번 第2次「시노드」에 期待와 關心을 모아왔던 것이다. 그 例로서 主敎共同性에 立脚한 司牧上王敎들의 共同責任實施를 위한 敎會制度改革, 「人間生命」 回칙 以後 世界의 反對輿論에 대한 積極的인 解答, 司祭獨身制문제를 포함한 司祭職危機의 克服策, 不振한 「에큐메니즘」에 대한 意慾的인 方向提示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敎會內外에서 關心을 모아왔던 이번 「시노드」가 그 期待와는 달리 敎會自體內의 結束問題를 主題로 다루게 된 것은 世界에 期待逆調의 印像을 짙게하였고 또 外信들도 우리에게 그와 같은 報道를 傳하고 있다. 그러나 期待疎外나 欲求不滿에 말려들어가기 以前에 「로마」가 보는 方向에 우리의 視線을 모아 볼줄아는 良識이 必要할 줄안다.
共同의 問題를 解決하기 위해서 衆意를 모으기 以前에 共同責任을 진 共同體의 團結力이 必要하듯이 이번 「로마」가 緊追한 여러 問題解決에 直接的으로 손을 대기 前에 信者들 相互間의 一致, 主敎들 相互間의 一致, 主敎團과 主敎團間의 一致 그리고 世界主敎團과 「로마」 聖廳과의 一致 解決을 求하는 것은 賢明하고도 論理的인 順序라 보고 싶다. 그러나 우리로서 한가지 指摘하고 싶은 것은 一致摸索에 있어서 그 方法論에 따라서는 中心点爲主의 一致도 可能하고 多數를 위한 一致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常例로 보아서는 一致의 效를 性急히 거두기 위해서 中心点爲主의 一致를 찾는 나머지 多數의 犧牲이 強要될가하는 点이다. 多樣性內에서의 一致와 一致內에서의 다양성의 認定은 반드시 同一한 內容의 一致가 아니라는 말이다.
世界敎會의 共同責任을 모으는 이번 「시노드」에 韓國主敎團으로서 그 代表가 參席하는 이機會에 우리는 같은 比例로 한국主敎團과 한국주교회 全體에게 같은 期待를 걸고 싶다. 信者들 相互間의 結束, 信者와 職者間의 結束, 聖職者들과 主敎와의 混合一體, 主敎들 相互間의 模範的 結束이 아쉽고 그 어느 問題解決에 앞서 이러한 一致를 爲한 最善의 方法 모색이 急하다고 보고 싶다. 우리의 一致와 結束없이 어찌 世界敎會의 一致를 論議하는 자리에 自信있는 參席을 하고 또 發言을 할 수 있을 것인가? 齊家治國의 東洋倫理가 여기 該當되지 않으랴!
다음으로 한국 교회대로의 諸問題点 所在를 發見하고 한가지 한가지씩 우리의 結束力을 가지고 果敢히 解決의 손을 대지 않으면 안되겠다. 2次 「바티깐」 公議會 이후 西歐敎會는 轉換期的 混亂속에서라도 하나씩 둘씩 自體의 문제를 處理하며 前進의 모습을 갖추고 있음을 알아야겠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社會의 後進性과 正比例로 우리교회 역시 刷新과 發展을 念願하면서도 그後進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음을 否認하지 못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그 後進과 沈滯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대로 적고 큰 「시노드」 即 硏究機構와 實踐에 必要한 方法을 樹立해야 할 줄 안다.
우리는 아직도 公議會가 提示해 준 制度와 機構조차 다組織實行하 지 못하고 있는 實情이니 어찌運營의 效를 期待할 수 있으랴! 過去에 많은 主敎會議가 한국교회 問題를 다루었고 얼마만의 公議會가 提示한 刷新을 위해 努力하여왔음을 是認하거니와 沈滯된 現狀態를 놓고 볼 때는 過去와 같은 主敎團의 領導力으로서는 앞으로 그 無力이 더 露呈되지 아니할까 念慮된다. 다음으로는 聖職者들의 精神的 司牧的 結束問題이다. 여기 그 具體的인 問題点은 指摘할 수 없고 또 그 原因의 뿌리를 따진다면 허다한 分析이 可能하겠으나 급한 대로 그 解決을 구한다면 한국 主敎團의 강력한 領導力에서 찾고 싶다. 上部構造의 一致團結없이 어찌 下部構造의 結束을 바랄 수 있으랴! 가톨릭의 敎階制度下에 있어 이러한 結東과 團結을 보지 못한다면, 더우기 믿음과 사랑의 共同體인 敎會에서 그 一致를 보지 못한다면 한국교회의 未來와 進路는 실로 암담하다 하겠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