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이래서는 안되겠어!』 교인이건 아니건 사람 모인 곳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이런 한숨 섞인 비판의 말들이 오가며 분위기를 숙연케 만든다. 사람은 모두 제 나름대로 생각하고 말할 자유가 있고 비록 편견일망정 자기 의견을 주장할 권리가 있다. 이것은 사람된 특권이기도 하다. 요즈음 우리는 우리의 관심을 모으는 크고 작은 화제들을 놓고 많은 말들을 열심히 한다. 오늘의 정국이 이렇고 업자들의 양심이 저렇고 또는 아폴로가 어떻고 월남이 어떻고 하는 제법 큼직한 「이슈」에서 교회가 이러니 아무개의 신앙생활이 저러니하는 온갖 「까쉽」들에 이르기까지 실로 많은 말들을 한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이 말들은 애초의 화제와는 거리가 먼 서로를 비난하는 말들로 어느새 변질되고 그래서 어느 모임에서나 모두의 표정을 어둡게 만든다. 필자도 예외일 수는 없다. 필자는 필자나름으로 일상의 생활주변에 오가는 무수한 화제들에 제나름의 관심과 견해로 많은 말들을 하고 또 이 말들이 예외없이 일방적인 비판 또는 비난으로 끝맺고 있음을 안다. 사실상 교회와 성직자에 관한한 이런 많은 말들은 이해보다는 오해에, 선의의 협조보다는 냉담한 무관심에 기울어져왔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여러 가지 교회와 성직자에 관한 말들 가운데 필자를 가장 슬프게 만드는 것은 성직자의 교회 또는 다른 성직자에 대한 비판의 말이다. 어느 의미에서 이런 비판이나 비난은 바람직한 결실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비난 섞인 토론도 결코 유해하다고만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 앞에서 성직자가 다른 성직자를 비난하고 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종파나 개인의 자질 또는 교회가 처한 여건 등에 앞서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는 것이며 나쁜 영향을 미친다.
그 영향이 얼마나 교회를 위해 치명적인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다같이 숙고할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성직의 존엄성은 평신도 편에서 오히려 더 큰 의의를 발견하며 지나친 기대는 지나친 실망을 가져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劉근준(서울大美大 敎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