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인권이나 인격이 존중되는지의 여부로 그나라의 문명을 尺度할 수 있고 한사람 한사람의 발언이 얼마나 존중되고 또 그말이 「책임」과 「信義」에 입각했는지의 여부로 後進性을 가늠할 수 있다. 이것은 국가나 사회 · 단체는 물론, 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교양이 부족한 사람은 어떤 주장이나 요구가 정의나 대의명분 혹은 논리에 입각한 것일지라도 자기 비위에 거슬리면 모든 것을 「否」에 일단 귀결시키고 만다. 그것이 비록 진실이건 아니건 알바없다. 그러니 판단의 척도는 쌓은 양식 혹은 지식과는 상관이 없다. 이같은 감정의 노예의 極致는 暴君을 상상하면 족할 것이다. ▲이같은 극도의 이기주의 안에서 형제애나 사랑 혹은 협조란 바라기가 아주 힘들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질서유지나 존중은 기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공동성」 같은 공의회 정신의 실천은 요원할 뿐이다. 위의 상황들은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일반사회나 교회 할 것 없이 모든 곳에서 쉽게 찾을 수들 있다. 유감스럽게도 兩者 안에서 우리는 쉽게, 상호관계가 商法來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닌 利害得失로만 성립되고 있음도 부인 못한다. 이런 현상은 날이갈수록 더 심해지는듯 하다. ▲무엇에서 공동 「비젼」이란 의기와 신념=힘을 얻을 수 있나 충고나 비판은 도무지 용납되지 않는다. 이 얼마나 「오만불손」한 자세인가. 이웃이나 형제란 情誼는 무참하게 말살되고 만듯한 형국이다. 우선 4월 29일 후의 전국학련 지도층과 학생의 관계가 그렇지 않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어른이나 학생간의 분위기가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같은 사이처럼 느껴진다면 큰일이다. 시정을 요구하는 자세나 이를 대하는데 있어 예의 · 질서 · 목적 · 태도 · 방법 · 대의명분이나 옳음이 앞서야 한다. 현재 교회내의 여러 다른 분위기나 관계가 공의회 후의 소위 과도기 현상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영광스런 추기경이 탄생한들 우리의 자세가 굳어있으면 그 土壤위에 그 영광이 어떻게 着土하고 자라며 결실할까? 이점에서는 정부 고위층이 國力伸張의 증표란 해석으로 기뻐하거나 교회밖 인사들이 환영하는 자세와는 완연히 거리가 있다. 왜 그런가? 무엇때문에? 과연 어떻게 해야 이 질식할 것 같은 정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我執)을 버리고 반성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