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서른날이 있는 秋9月」은 여느때 같으면 1년중 가장 좋은 절기다. 『더도덜도 말고 1년3백예순 날이 추석만큼만 되라』는 우리네 농민들의 염원도 있듯, 긴 여름의 노고 끝에 풍성한 수확을 거두는 농부는 누구보다 흐뭇한 풍족감에 싸일 시절이다. 그래서 고독을 사랑하는 詩人도 『마지막 과일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南國의 햇빛을 주시어 그들을 完成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드주 속에 스미게 하소서』 그들을 위해선 더한 풍족을 기원하는 대신 자신을 위해선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쓰리라』하여 더욱더 고독해짐으로써 영혼은 오히려 더맑고 깊은 경지에 도달한다. ▲이처럼 풍요한 물질의 수확도 정서의 깊이도 잃어버린 사람들의 가을풍경은 어떠한가? 긴 여름의 인고로 무르익은 곡식의 대해를 바라보며 풍년을 기대하던 농부의 꿈은 수포로 돌아가고 집을 잃고 어느 낯선 추녀밑에 짐승처럼 몰려앉은 인간가족, 거기엔 배고픈 아이들의 애절한 눈망울만이 주렁주렁 영글어 있을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가을도 낙엽이 바람에 구으는 도시의 포도를 서성거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가슴속엔 가을의 낭만이 흐르는 대신 변절, 변칙, 극한 투쟁 따위 정치의 熱風에 맺힌 그을름만이 박쥐처럼 매달려 있을 것이다.
이제 燈火可親의 氣風마저 잃어가는 大學의 「켐퍼스」는 권력에 덜미를 잡힌 교수들의 만류에 저항하며 데모하고 절식농성을 하고 마침내 울음을 터뜨린 젊은이의 가슴엔 「분노가 포도처럼」 주렁주렁 맺힐 것이다. 이 가을은 도시에서도 농촌에서도 이처럼 자연의 결실 아닌 인간의 감정과 의식의 결실이 주렁주렁 맺여진다. 그러나 자연의 결실이든 意識의 결실이든 어느 때든 結實은 下落하기 마련 『어느 한사람이 있어 이 下落을 한없이 너그러히 그의 양손에다 받아들이는』 날이 있을 것이다.
너그러운 그 손길에 떨어지는 나의 괴로운 열매는 과연 알찬 것인가 아니면 보람없는 헛된 것인가? 묻지 않아도 그것은 그 괴로움을 받아들인 나 자신에 달려 있을 것이다. 어차피 세상은 苦海, 다시말해 문제의 촛점은 이 괴로움이 끝나지 않는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인간의 자세에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