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하지 않았던 폭우로 하룻밤 사이에 삼남(三南)의 형제들은 4백이 넘는 인명을 잃고 또 4백이 넘는 부상자가 지금 신음하고 있다. 정부집계에 의하면 재산상의 피해만도 1백78억이란 실로 엄청난 숫자다. 그 결과는 현재 약20만이란 재민들이 황폐한 옛터에서 울고 있는 것이다. 온갖 슬픔과 굶주림과 추위와 질병의 고통을 한몸에 안고 절망의 시간을 참고 있는 것이다.
외롭고 절망한 나머지 그들, 우 리의 동기(同氣)들은 하늘을 원망하고 우리의 안락한 생활과 무심을 저주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그들을 위하여 했단 말인가. 그들의 고통을 몇 번이나 그리고 얼마나 생각했으며 그들의 재난을 얼마나 내몸같이 나누어 아파했더란 말인가. 국민의 일부가 이런 재난을 당할 때마다 구호는 정부나 혹은 누군가가 할 것으로 막연하게 생각하고 바로 내 앞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에 대하여는 한번 놀라 보는 일도 없이 무관심하게 먼 역사를 듣는 것처럼 흘려버리는 것이 우리의 습성이 아니던가. 무관심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른 어느 사회단체보다 그리스도 신자들이 무관심하지 않느냐 싶어진다. 공동체의식을 누구보다 강조하고 「사랑」을 누구보다도 많이 배우고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법」을 잘 아는 우리가 20만명이나 되는 재난을 당한 형제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는다면, 그 참상의 보도를 그처럼 많이 듣고도 다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소위 그 「사랑」은 병든 사랑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천주를 사랑하는 사람은 성당과 교회가 미어지도록 많지마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를 위하여 천주님께 억지를 부리는 사람, 천당 좋은 한자리를 노리는 사람은 많아도 남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원하고 형제들이 나와 같이 잘살고 같이 발전하기를 애써 힘쓰는 사람은 특히 우리 교회에 많지 않은 것 같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사랑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외치면서 형제들의 재난에는 무관심하고 외면한다면 천주교신자처럼 철저한 「에고이스트」가 없다 세평을 받아도 할 말이 없으리라.
『눈은 손을 보고 「너 같은(하천한) 것은 소용없다」고 할 수 없고 머리는 발을 보고 「너 같은 말단 노무자나 농삿군은 소용없다」고 할 수 없다. …신체의 일부분이 아파하면 모든 지체가 다같이 아픈 것이며 지체하나가 소중히 여겨지면 모든 지체가 다 같이 기뻐하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꼬린토 전서」 제12장에서 그리스도 안에 공동체의식을 이렇게 풀이하면서 현대인에 결여된 연대감(連帶感)을 특히 강조했던 것이다. 내 지체의 하나가 수재를 당해서 고통 중에 있어 머리되는 예수님의 성심은 비할데 없이 애통한데 다른 수족들은 아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왼손이 심한 상처를 입으면 바른손이 순식간에 왼손을 잡는 법이다. 이 연대의식이 인간의 참된 모습이다.
우리는 영혼만을 구한다는 강렬한 의식속에서 너무나 오래도록 사회와의 문을 닫고 인간이 발을 붙이고 있는 이 지상의 모든 것을 경시한 나머지 인간 본래의 사회성 그 제일의 책임마저 잊고 형제들의 고통에 마저 무감각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느님은 인간을 고독한 생활을 위해서가 아니고 사회(社會)를 구성케 하기 위하여 창조했다. 하느님은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상호연락이 완전히 두절된 채 성화와 구원을 약속한 것이 아니고 그들을 진리에 따라 하느님을 인식하고 충실히 봉사하는 하나의 「백성」으로 확립됨을 옳다고 했다.
따라 하느님은 인간을 개인으로서만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의 「멤 버」로서 간택하셨던 것이다』 현대세계 「사목헌장」은 새로운 신앙인의 태도를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수재민은 「남」이 아니요. 곧 「나」다. 그들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공존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원죄와도 굳게 맺어져 있는 것이다. 그들 수재를 당한 형제들이 우리들 구원없이 한시라도 고통을 당했다면 그것은 곧 나의 원죄의 더욱더 한 과중을 뜻함이 아닐까. 하느님 앞에 할 말이 없고 대할 낯이 없다.
삼남 수재민구호에 우리교회가 조직적으로 별다른 구호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첫째 우리 신자들의 신앙하는 태도가 새로운, 열려진 교회의 「이미지」를 부각시키지 못하고 있는 구태의연한데에 그 원인이 있겠고 둘째 관심을 불러일으켜야할 연락 조사 보도의 체계가 없었다는 점 그리고 이런 돌발적이요 시급한 재난에 대비하여 직각적인 구호활동에 임할 수 있는 조직이 평상시에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점등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교회 안에는 실로 많은 단체와 사업들이 있다. 그러나 구호는 의례히 외국의 자선단체에서 하는 것처럼 우리는 즉각적으로 움직일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가령 교구뿐 아니라 본당에도 이런 조직이 있는 것 같지 않다.
본당예산에 우리 본래의 책임인 일반구호나 재민구제에 대한 예산을 책정해 놓은 본당이 몇개소나 될가. 심히 의심스럽다. 재민구호는 시간을 다툰다. 기다릴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다.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을 옛날에는 남을 해치지 않고 상처를 입은 사람을 돌봐주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고 이것을 애덕의 완벽으로 쳐해 왔다. 그러나 새로운 애덕의 길은 그런 동정(同情)만으로 하느님의 뜻이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생활에 있어 남이 나와 같이 진보발전하기 위하여 까지 전력해야 하는 것이다. 삼남수재민이 하루라도 빨리 쓰라린 고통을 잊고 옛날의 평화를 되찾고 또 나와 같이 나만큼 잘 살 수 있도록 우리가 앞장서서 참된 사람을 실천하자.
우선 그 한 방법으로 단체는 물론 전국본당이 주일연보나 다른 방법으로 재민구호금을 모으길 제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