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이란 잠시라도 말없이 살 수 없는 存在인양 두 사람만 보여도 말을 주고받게 마련이다. 말이라는 意思表示의 道具가 아직 不完全했던 때의 社會는 그만큼 未開했고 不便한 社會였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社會的 禍根이 되고 對人關係에 不和를 가져오는 실마리, 또한 말임은 그 무슨 矛盾인가? 말은 誤解의 샘이라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聖書에 나타나는 聖母님은 참으로 말이 적으시다. 神의 뜻을 따라 몹시 놀라운 구속사업에 참여하시면서도 『이 모든 것을 中心에 삭이시며』 말이 없으신 모습을 볼 수 있다. 듣고 感歎하고 받아들이는 것 만으로 벅찼기 때문이셨으리라. 과연 神의 말씀에 오롯이 귀기울인다는 것보다 더 좋은 기도가 없을 것이다. 人間社會에서도 마찬가지로 他人의 말에 정성껏 귀기울일줄 안다는것, 이것이 곧 사랑의 첫걸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에게는 父母兄弟와 子女를 포함하는 이웃을 사랑해야 할 커다란 義務와 기쁨이 주어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웃이 귀찮은 存在가 되거나 警戒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음을 볼 때 슬퍼지기까지 한다. 이웃과 人事를 나누며 安否를 묻는 일이란 都市社會의 風習에서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이러한 無關心이야 말로 憎惡보다도 쓰라린 現代社會의 상처이지만 우선 가까운 家族 親知들과의 關係에서만 보더라도 反省하고 努力해야 할 일이 많다. 과연 얼마나 많은 家庭이 진지하게 子女들 各自의 人生의 고민을 의논하며 父母의 固陋한 편견으로 强壓하지 않고 귀담아 듣는 對話가 可能할 것인지?
예수께서는 門前에서 求乞하는 나자로를 돌보지 않았다고 나쁜 富者를 責하시었다. 바로 그 예수께서는 오늘날 父母요 兄弟들인 우리에게 門前에 있는 나자로는 고사하고 한 지붕 밑에 있는 나자로에게 無關心하다고 나무라실 것이 분명하다. 좀더 眞心을 쏟아 귀를 기울임으로써 이웃의 말을 내것 삼아 同調하거나 걱정할때 이웃에의 사랑이 完全해 질 것이요 우리가 서로 사랑할때 天主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完全해 지리라고 하신 이 엄청난 奇蹟이 實現되리라.
洪承玉(서울大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