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事件뒤에는 女人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政治人뒤에는 記者가 있다』고 나는 내세우고 싶다.
韓國가톨릭敎人 出身으로서 政治家라고 손꼽는다면 張勉 博士를 내세우기를 주저 않을 것이다.
張勉 博士 뒤에도 記者가 있었다. 그 記者란 바로 筆者나 自身이었다. 張 博士는 이 事實을 그가 살아계시는 동안에 別로 알고 계시지 않았으리라고 생각되는데 그 理由는 나 自身이 他人에게 이야기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張 博士는 故人이 되었으니까 이제는 말해도 괜찮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秘話를 엮어 보려는 바이다.
1948年 8月
그러니까 5·10選擧로 政府를 樹立하고 初代內閣을 李承晩 博士가 梨 梨花莊에서 막 끝낸뒤었다.
항간에서는 그 初代內閣을 評하여 「비서내각」이니 또는 「三等內閣」이니 或은 「샤벨內閣」 등등으로 表現했고 심지어 某日刊紙에는 態超 先生이 「猛虎出林之圖」를 비꼬아 「大山林之圖」를 그렸다. 우리나라 처음으로 出生한 長官의 面面이 그리 신통치 않다는 評을 받았다.
나도 생각하기에는 張勉 先生 한분쯤은 文敎部長官자리라도 할 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安浩相씨가 그 자리에 任命되었으므로 意外의 일이라고 여겼다. 長官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張勉 先生 自身은 얼마나 서운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내 딴에는 先生님을 찾아가 뵈옵고 위로의 말이라도 傳하기 위해서 惠化洞 自宅으로 張勉 博士를 찾아갔다.
『이왕 長官자리는 다 꽉차버렸으니까 張 博士의 나아갈 政治의 方向을 國內에서 國外로 즉 國際的으로 돌리는 것이 좋을 것이요. 그래야만 그이의 活動舞臺가 넓어지리라』고 나만이 생각하면서 惠化洞을 찾아갔다.
그날 下午 4時께.
張勉 先生을 만나 人事를 올렸다.
『글세 文敎部長官자리하나는 할 줄 알았는데…』 말끝을 흐려버리는 餘韻속에서 운해하는 表情을 나는 캣취하여 이렇게 당돌하게 말문을 열었다.
『유·엔에 나가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第3회 「빠리」 유·엔 총회나 가셔서 한국정부의 국제승인 획득을 위해 일해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張勉 先生은 내말을 귀담아 듣더니 『그러나 李 博士께서 날 보내주겠나?』 의심 섞인 語調였다.
이윽고 나는 惠化洞을 물러나와 그 길로 梨花莊으로 줄달음쳤다. 나의 머리에는 이러한 생각으로 꽉 들어차있고 그러한 方向으로 張勉 先生의 政治的 進路를 提示하면서 「푸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安逸한 長官감투한자리 쓰고 있느니 보다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한 중대문제가 걸려있는 「빠리」 유·엔총회로 張勉 先生이 갈 수 있게만 된다면 敎會에도 큰 榮譽로운 일일 것이다.
뛰는 가슴을 부등켜 안고 나는 단숨에 梨花莊으로 달려가 大門을 두드렸다. 그러나 梨花莊의 門이 열릴지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이 門은 出入禁止로되어 더우기 記者는 出入禁止가 되어있었으니 大韓民國 政府樹立宣布를 앞두고 梨花莊은 굳게 門이 닫쳐있었기 때문이다.
金基永(每日經濟新聞編輯局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