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나는 사소한 주위의 사물(事物)이나 사람들의 하잖은 대화(對話)에서 놀라운 시상을 얻기도 한다. 동리 어린것들이 소꿉장난을 하고 있는 곁에 가만히 앉아 그들의 거동을 관찰하노라면 그곳에도 흔히 시의 테마가 숨어있고 길을 가다가 길가에 우거져있는 가시덤불이나 풀섶 등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앉았노라면 그곳에도 또 아름답고 놀라운 시의 소재가 숨어있기 마련이다.
벌써 오래 전 일이었다. 나는 오랫만에 출장을 가는 길에 고향을 들렸다. 그리고 중학교적 은사(恩師)한분과 光州無等山을 오른 적이 있었다.
때는 마침가을철- 산비탈길에는 누가 씨를 뿌렸는지 물방울 같은 코스모스들이 수북히 피어있고 연변 마을에는 과일들이 무르익어 있었다. 『이 코스모스들은 우리 등산패걸이들이 산을 오르며 씨를 뿌렸던 것들이지.』
산을 즐겨 오르는 은사의 말을 듣고 나는 비로소 이 한적한 산비탈길에 아름다운 코스모스를 피게 해준 주인공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 「응」- 나는 여기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 가슴속에 퍼지는 순간적인 파문(被문)을 느꼈다.
이럴 때 나는 흔히 시를 잉태하고 그 한참 후에는 또 시를 생산(生産)해 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의 은사의 말이 나의 가슴을 더욱 세차게 때려 주었던 것이다. 『이 세상은 참 고달프고 딱딱한게 사실이지. 그러나 그런대로 가을이 오면 오곡이며 온갖 과물들이 무르익어주는 것을 보면 참 기가 막히는 일이지.』
늙은 은사의 말에 나는 차라리 어떤 신앙심(信仰心)같은 것까지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순간, 나의 가슴은 갑자기 뿌듯해오면서 비로소 어떤 시상 하나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세상인심은 나날이 각박해가고 비옥한 땅 보다는 박토가 많은 이 세상이지만 그 땅에서도 변함없이 알찬 곡식이 나고, 온갖 파일들이 무르익을 수 있는 것은 누구의 은총인가, 하는 뜻에서다.
그후 몇개월이 지났을까 혹은 몇년이 지났을까 나는 지금 자세한 기억이 없다. 그러나 그때의 그 감동으로 나는 비로소 시 한편을 써낼 수 있었던 것이다.
(別項 詩 「果木」參朝)
「果木」이라는 시의 전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事態」란 말을 썼는데 이 「事態」란 말은 일상 흔히쓰는 말이기도 하지만 시어(詩語)로서는 나대로 하나의 대담한 실험을 한 셈이었다.
이 「事態」란 말은 <果不에 果物들이 무르익어 있는> 상태를 나는 하나의 「事態」로 보았기 때문에 그것은 좀 특이한 표현이었고, 이 시를 두드러지게 부각시킬 수 있었다고 자부(自負)도 해보는 것이다.
시인은 이와 같이 모든 일에 관심을 갖고 또 주의 깊게 관찰해야 된다고 생각된다. 세상의 움직임은 물론 하잖은 어린것들이 노는 모습, 사소한 자연현상(自然現象)도 그 보고 느끼는 방향이나 각도에 따라 훌륭한 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果木」이란 시를 쓰게 해준 그 은사도 이 시에 관심을 가졌던지 혹은 그때 나와의 대화가 생각이 났던지 언젠가 모대학의 입시문제에 이 시를 출제했다고 전했다. 이 시의 전문을 밝혀주고 제목을 알아맞추라는 문제였는데 아깝게도 한사람도 정답이 없더라고.
果木
<果木에 果物들이 무르익어 있는 事態처럼
나를 驚악케 하는 것은 없다.
뿌리는 薄質 붉은 黃土에
가지들은 한낱 비바람들 속에 뻗어 출렁거렸으나
모든 것이 滅裂하는 가을을 가려 그는 홀로
황홀한 빛갈과 무게의 은총을 지니게 되는
果木에 果物들이 무르익어 있는 事態처럼
나를 驚악케 하는 것은 없다.
-흔히 詩를 잃고 저무는 한해, 그 가을에도
나는 이 果木의 奇蹟앞에 視力을 회복한다.
朴成龍(詩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