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계속 3선 허용과 국회의원 수의 증원 및 대령통에 대한 탄핵소추를 보다 어렵게 하는 것을 중요골자로 하는 개헌안이 오는 7일 국민투표에는 부쳐진다. 또 정부의 신임여부가 이번 투표에 매여져 있다.
그동안 이 개헌안이 제출되어 국회를 통과하기까지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학생 「데모」 조기방학, 대학, 고등학교의 휴교소동 「데모」학생의 징계, 신민당의 해체 국회의사당의 점거·농성·제3별관 새벽국회에서의 가결선포 신민당의 재결성등서 부활극 같은 정치 「드라마」속에서 지난 석달을 살아왔다. 그 위에 겹친 영호남 수해와 콜레라는 많은 생명과 재산 그리고 부풀었던 풍년의 꿈을 앗아가고 말았다. 이재민들은 아직도 허탈 상태에 빠져 정치인들의 개헌유세도 귀에 들리지 않는 형편이다. 그런데도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일은 앞으로 닷새밖에 남지 않았다. 슬기로운 사람은 어지러운 때 일수록 제위치를 바로잡고 멀리 내다보며 바르게 판단한다. 감정에 휘말려 사는 사람을 소인이라고 한다. 감정이 인생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 때문에 인생의 방향을 그르쳐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우리백성은 가장 침착하고 슬기로워야할 때에 놓여 있다고 본다. 꽹과리소리에 미쳐 춤을 추는 광대가 되지 말고 그 꽹과리를 지켜보는 후견인이 되어 바른 지혜와 판단으로 이 나라를 복되게 하여 후손에 넘길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흐름은 그 시대 사람들의 사상의 흐름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세계적인 이상기류 속에서 제마다 그 방향을 바로잡아야 하겠다고 걱정하고 있다. 어느 사이에 세계는 하나의 공동체로 집약되어 같은 운명속에서 서로 돕고 의지하여 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시대를 공동체의 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통치구조는 힘의 지배로 변질되어가고 그 힘은 저마다 부자가 되어 편하게 살자고만 서둔다. 그 피안은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놀고먹는 사람이다. 인생을 값지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삶을 향략하자는 것이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를 불신한다. 기성세대도 젊은 세대를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 동서가 한 나라 같이 내왕하면서도 사람은 두편으로 갈라져 있다.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관능족과 이지족…, 그러면서도 오늘을 공동체의 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교회는 초자연 질서를 다스리고 정치인은 자연질서를 다스린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질서 속에서 살고 초자연질서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질서는 인간을 초자연질서로 안내하는 통로로 이해되어야 한다. 교회는 정치에 직접적인 관여를 하지 아니하면서도 항상 그 후견인으로서의 책임을 져야한다. 초자연질서에 위배되는 것이 있으면 판단하고 경고하고 가르칠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정치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위에서 초자연질서와 관계되는 영역의 자연질서를 교회적인 방법으로 간섭하고 지도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그리스도가 모든 인류의 구속을 위해 교회를 세웠다면 교회는 마땅히 인류전체를 복음화하는데 그 목적을 두어야 할 것이다. 교회안에 있는 신자뿐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가 목적하는 지상의 복음화는 곧 모든 인류와 자연질서의 복음화를 뜻한다. 마치 정치인이 제백성에게 자연적 이익을 주기위해 간섭하는 것과 같이 교회는 그들에게 초자연적 이익을 주기 위해 간섭하는 것이다. 물론 그 간섭의 방법은 서로 다르다. 교회는 정치인이나 행정인과 같이 직접 그 백성을 통치·행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복음화를 돕는 것이다.
구속의 대상은 물론 사람이다. 그러나 그 사람을 구속하기 위해 그 사회의 복음화가 필요한 것이다. 오늘의 평신자사도직이 바로 여기에 그 목적을 두고 있지 않는가. 우리들은 매일 몇번이고 하느님의 뜻이 천상에서와 같이 지상에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있지 않는가. 따라서 오늘의 복음화운동의 대상은 바로 이사회 전체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필요로 하고 있다. 보다 무거운 책임을 지고 국민투표에 임해야 할 것이다. 그 찬반은 각자의 의사에 매인 것이로되 그 판단기준은 언제나 이 땅의 복음화에 두어야할 것이다.
오늘의 정치현실은 많은 유동성을 내포하고 있다. 북에서는 공산진영이 우리교회와 이 나라의 자유를 노리고 있다. 안에서는 정치인들이 잔꾀를 부리며 아귀다툼을 일삼고 있다. 그동안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산업이 급속도로 개발된 반면에 부정·부패와 반교회적인 사조가 항간을 스쳐 흐르고 있다. 재화의 가치는 그 재화를 쓰는 사람에 매인 것이다. 따라서 많은 재화를 가지는 것만이 행복의 길은 아니다. 경제개발은 반드시 인간개발을 동반해야 한다. 인간개발을 제2의 경제로 개념하는 물질 우위의 사상은 크게 비판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모든 문명과 생활의 편의는 인간완성에 쓰여짐으로써만 가치화하는 것이다. 국민이 주권자인 것과 같이 인간이 모든 재화의 주재자인 것이다.
사회의 건전한 발전은 질의 안정위에서 이루어진다. 오늘의 우리 사회가 가장 아쉬워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사회의 안정이다. 안정은 사물이 제자리에 놓이고 제궤도를 달리는 것을 말한다. 모든 정치와 생활이 하루빨리 제자리에 놓여 안정을 얻어야 하겠고 그 속에서 모든 백성이 하느님의 평화와 사랑을 누리며 복되게 살아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 교회는 이 사회의 슬기로운 후견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