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돌고 머리위에 인공위성이 돌아가고 달이 「아베크코스」가 되더라도 강물이 거꾸로 올라가거나 바다물이 싱거워 질수는 없을 께다.
역사가 변천하고 인간의 사고 작용과 생활환경이 달라지더라도 결코 변할 수없는 무엇은 항상 우리 안에 존재한다. 지구의 구심점이 그렇고 팽이의 구심점이 그러하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 자기안의 구심점을 잃고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밤을 낮삼아 술로 지내거나 시어머니의 자리와 며느리의 자리가 뒤바뀌어 돌아가는 따위나 가정과 여관을 구별하지 못한다든지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를 잃어버린다든지 하는 따위는 다 돌아가는 구심점을 잃은 상태일 것이다. 특히 아가씨들의 미니와 화장이 아름답기 위해 한노릇이 때로는 아름답기커녕 꼴불견이니 아름다움의 가치를 뒤바꿔 놓은 것이 아닌가.
아무튼 많은 것들이 뒤바뀌어 졌다. 의복이 그러하고 학술이 그러하고 도대체 사회가 그러하다. 하기야 성당의 모습도 많이 바뀌어졌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모습들 예절 미사마저도 변해가고 있으니 수녀들의 수도복이 변해짐도 마땅하리라.
그러나 인간은 有限한 동물인 동시에 生成·發展하는 동물이고 보면 인간의 이와 같은 변화는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人間의 역사도 끊임없이 변천한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다람쥐의 체바퀴처럼 한자리에 붙박혀 무의미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불변하는 영원한 정점을 향해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면서 끊임없이 선회한다. 이 불변하는 정점,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궁극적 목표이며 최종적인 理想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人間個人은 生成·發展·쇠퇴·소멸해가면서까지 인간의 종국적인목표 하느님을 지향하는 한 결코 무가치하지도 허무하지도 않은 오히려 영원한 의미를 내포한다.
이러므로 인간의 선회는 하느님을 主軸으로 하는 이상 도중에 어떤 우여곡절이 있을 망정 결과적으로 그 정점은 명백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을 자기중심으로 바꾸어 놓을려고 한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이는 가장 큰 계명이요, 제일 첫째 계명이니라.(마테 22·39)고 분명히 하느님은 말씀하셨는데도 우리는 편리상 주일의 미사참례만을 제일계명으로 바꾸어버린다.
마땅히 방문해야할 병자를 핑계로 잊어버리거나 신앙을 받으려 하는 이웃형제들에게 거절하거나 무시해버리는 따위는 고해거리가 되지 않고 주일미사에 빠진 것만 고백하는 우리들이 아닌가! 내입만 위하고 내배만 위해서는 이웃형제에게 슬픔과 눈물도 서슴치 않고 안겨주는 자들은 바오로 종도의 말씀과 같이 하느님이 내배로 바뀌어지는 꼴이 아니고 무엇이랴.
朴炳基(대구 삼덕보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