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元曉大師가 하루는 道를 묻는 제자들에게 『나는 俗에 가깝기를 원하는 중(僧)이다. 너희들은 중에 가까운 俗이 되면 제일 좋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얘기가 있다. 다른 말은 두고라도 우리 平信者로서는 「중에 가까운 俗」이 되라는 평이한 말 한마디 뒤에 숨어있는 깊은 의미를 한번쯤 음미해 보는 것이 좋을 성싶다. 그 말은 신앙에 불리워진 우리 자세의 근본적이고 원칙적인 前提를 일깨워주면서, 俗에 속해있고 俗을 존중하되 俗에 집착하지 않는 淡白함의 지혜를 동시에 문득 暗示해주기 때문이다.
▲하기야 예로부터 生을 苦海라했거니와 그러한 지혜란 內的鬪爭이 별로 없는 안이한 자세로선 밥먹듯 수월히 취득되는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님은 물론이다. 肉體와 限界라는 지극히 뛰어넘기 난삽한 條件속에 존재하는 우리들이 이름만의 신앙인이 되지 않으려면 싸우고 피를 흘리고 忍從하며 기다림이 유일한 生의 내용이 되기 마련이요, 그것을 통하여 어쩌면 『어리석도록 인간을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피를 조금이라도 悽然히 감각할 수 있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실천적 신앙생활이라든가 表樣이 무엇보다 중요함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좀 지난 이야기지만 국민투표의 「무드」가 꽤나 수다스럽게 조성돼갈 무렵에 「易術人大會」라는 심히 생소한 무당행사가 있어 항간에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그런데 우리들로서 더욱 아연했던 일은 그 대회의 고문석에서 평소에 가톨릭신자라는 명찰이 유난히 반짝이던 某유명한 정치인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였다. 自意로선지 他意로선지 그 연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명백한 기정사실이 돼버린 후에도 공적인 아무런 異議도 표명하지 않았던 것만은 사실이다. ▲봉황이란 새(鳥)는 낭간이 아니면 먹질 않고 오동나무가 아니면 집을 짓지 않는다 한다. 공연히 옹졸해질 필욘없지만 스스로의 기본적 「이미지」를 더럽힐 粗惡한 음식은 신앙의 이름으로 단호히 拒否하는 편이 보다 떳떳하고 현명한 態度가 아니었을까?
▲아쉬움을, 괴롭도록 솟구치던 아쉬움을 想起하면서 우리는 새삼 되뇌어 보지 않을 수 없다. 『푸당맛은 먹는데 있고 신앙의 證明은 生活에 있다』는 너무도 상식적인 眞理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