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至今 「매스콤」의 全盛時代에 살고있다. 그리고 우리는 新聞 · 라디오 · TV는 두말할 나위도 없고 날로 늘어만 가는 가지각색의 週間 또는 月刊紙 때문에 숨돌릴 사이도 없이 言語의 폭포 속에 휩쓸려들어가고 있다. 人間의 人間다운 것은 言語를 使用할 수 있는 것이고 人間에게 他動物과는 判異한 能力이 있다며는 그 가장 重要한 것이 言語를 使用할 수 있는 能力이라고 할 것이다.
이와같은 人間의 言語能力을 縱橫으로 發揮하며 우리 生活에 至大한 影響을 미치고 있는 것이 바로 「매스콤」의 偉力인 것이다. 言語는 思惟와 抽象을 可能케 하고 社會生活의 圓滑油가 된다. 勿論 言語에 依'하지 않는 思惟와 抽象도 可能하고 社會生活에서 惹起되는 紛爭이 言語의 誤用에서 綠由되는 境遇도 많다. 그러나 우리의 思惟와 抽象活動의 大部分이 言語에 依해서 이루워질 뿐만아니라 그 結果는 言語에 응결되어 社會의 公有物이 된다. 그리고 社會生活에서 惹起되는 紛爭도 그 大部分은 言語에 의한 意思의 交換으로써 解決된다.
그러므로 우리 人間은 어느모로 보아서는 言語라는 記號에 依해서 形成된 認識體系라고 할 수 있으며 社會는 言語라는 記號體系가 機能하는 廣大한 組織體라고도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듯 우리 人間과 密接不可分離의 關係에 있는 言語에 對해서 無關心 乃至 매우 막연한 態度로써 臨하려고 한다. 이것은 물(水)과 空氣가 우리에게는 없어서 안될 必常物인데도 不拘하고 우리는 이것들에 對해서 別로 큰 關心을 가져보려고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言語가 一種의 記號라는 것을 잊고 言語와 言語가 意味하는 것과를 混同하려고 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迷信的인 態度로써 그것을 神秘化해서 對하려고 하나. 서울 한복판에서 上空을 뚫고 치솟고 있는 現代式 高層建物에서는 「四」라고 하는 數字는 層階表示 板에서 除外되고 있으며 어느 모임에서는 그 모임날字에 「十三」이라는 數字가 들어가는 것을 몹시 꺼려한다.
「四」라든가 또는 「十三」이라는 것이 數를 表示하기 爲해서 使用되는 一種의 記號라는 点을 잊고 그것들에게 어느 實體를 結付시켜 對하려는 迷信的인 態度를 取하며 이에 對해서 疑心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言語가 뜻하는 것을 文字 그대로의 意味에서 「참」으로 받아들이고 活字化에는 無條件 權威를 認定하려고 하며 「매스콤」에 依해서 傳播된 것은 덮어놓고 그 모두가 全部 「眞相」이고 「正當」한 것이라고 하고 그것을 그대로 生活의 基礎로 삼으려고 한다.
바쁜 生活에 쫓기다 보며는 言語와 그것이 뜻하는 것을 明確히 분간해서 行動한다는 것은 매우 手苦스러운 일이고 더구나 言語가 指示하고 意味하는 것의 眞僞를 가린다는 것은 一層 더 手苦스럽고 因難한 일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日常生活은 言語의 물결속에서 그가 너울거리는대로 너울대고 그가 흐르는대로 흘러가게 마련인 것이다. 그리해서 우리의 日常生活은 언제나 言語의 魔力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것이 파놓은 함정에 걸려들게 되어 우리의 듣고 아는 自由는 恒常 威脅을 받고있게되는 것이다.
「매스콤」은 言語의 묽결을 너울지게 하고 그 흐름의 方向을 決定짓는데 至大한 偉力을 發揮하면서 좋은 面에서나 또는 나쁜 面에서 우리 生活에 적지않은 影響을 미치고 있다.
우리들은 우리의 日常生活이 言語의 魔力에서 벗어나서 그에 의해서 常時 侵犯當하고 있는 우리들의 듣고 아는 自由를 回復하고 그의 참 모습을 되찾을 努力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은 勿論이지만 「매스콤」도 一般大衆이 언어의 魔力의 犧牲이 되지 않도록 言語 정화의 責任의 一端을 져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姜顔熙(서울家庭法院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