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工場으로 들어간 生產原料는 아름다운 商品이 되어 나오지만 근로자는 헌걸레가 되어 공장에서 나온다』고 JOC창설자 故갈던 추기경이 말했다.
이 말은 社會主義나 共産主義思想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福音精神으로 생활하는 者가 現代勤勞者의 상황을 關心과 사랑으로 관찰한 후에 산업문화의 흑점을 지적해준 말이다.
교회가 갖는 근로자에 대한 관심은 부쩍 늘었다. 1925년 JOC창설 이후 근로자들 자신이 敎會를 외면하는 동료들에게 교회의 참된 모습을 나타낼려고 하였으며 1969年 6月 10日에는 교황께서 근로자에 대한 관심을 「국제노동기구」를 방문하심으로써 나타내었다.
그 위에 노벨平和賞이 이 기구에 수여되었다는 것은 근로자에 대한 관심이 국제적이라는 것을 표명하고 있다.
한국은 지난 몇년간에 巨歩의 발전을 보았고 누구나가 한국이 역사상 지금처럼 경제성장을 보인적이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상황 속에 처해있는 노동문제를 살펴보자. 현대한국에 가장 적합한 노동이란 낱말의 정의를 내려 본다면 『노동은 근로자가 피와 땀을 흘려 일을 해서 자본주에게 이득을 보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가 생각된다. 근로자는 자기의 노동력을 헐값으로 팔아서 겨우 자기와 자기가족의 생명만을 유지해 가고 있는데 반해 자본가들은 勤勞者들이 상상도 할 수없는 거대한 利得을 보고 있지 않은가? 공장은 자꾸만 커가지만 거기에서 일하고 있는 勤勞者들의 집은 점점 더 초라해져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을 관찰하고 개탄하며 비록 실효성을 갖긴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개최된 것이 10월 24일 서울시민회관에서 「사회발전과 노동문제」를 주제로 한 대강연회였다.
가톨릭과 개신교 대표들의 열띤 강연이 청중들에게 문제의식을 불어넣은 것은 사실이고 또 양교회에서 공동으로 자기들의 勞動觀을 발표하게 된 것은 교회일치운동에도 기여한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교회가 노동이란 사회문제에 대해서 발언하게 된 것은 아주 뜻있는 일이다. 그러면 교회는 어느 편인가? 노동자의 편인가, 자본주의 편인가? 문제를 이렇게 제시한다면 교회는 답변할 수없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른다. 『너희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테오 25, 40) 교회는 가난한자와 약한자를 위해 봉사함으로써 바로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것이다. 경영자와 근로자를 놓고 볼 때 현한국 실정으로는 후자가 가난하고 약하다.
흔히 근로자를 옹호하고 근로자를 위해 활동하면 공산주의자로 누명을 쓰지만 실상 대한민국사회를 위하고 조국을 사랑한다면 근로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 조국근대화의 지름길인 것이다.
근로자의 人權이 보장된 나라에서 공산주의가 행패를 부릴 수 없고 근로자를 무시하고 학대하는 곳에 공산주의가 싹트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근로자를 위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위하게 될 것이고 근로자의 人權옹호에 앞장섬으로써 조국근대화를 이룩해 주는 것이다.
노동은 하느님이 人間에게 自身을 完成하라고 주신 창조력이다. 그렇다면 근로자는 노동을 통해 행복해져야 할 것이고 노동은 근로자에게 기쁨을 줄 수 있어야 할 점이 많다. 노동은 본래부터 勞苦를 포함하고 있다. 모두가다 그렇지는 않지만 勤勞者중 노동을 싫어하고 가능하면 수고하지 말고 잘살 수 있는 방법만 찾는 자도 있다.
이것은 勞動自體를 무시하는 것이고 따라서 노동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또 勤勞者들의 분열이 경영자와 근로자간의 분열보다 더 심한 곳도 있다.
동료가 피해를 받아도 자기만 경영자와 친근하게 지내자는 욕심이다. 힘은 단합에 있고 분열은 힘을 멸한다. 경영자와 勤勞者가 단합되고 勤勞者와 勤勞者가 단합되면 나라건설의 힘이되고 社會복지를 이룩하는 힘이되는 것이다.
교회는 이번 대강연회를 통해 노동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교회는 말하는 입보다 듣는 귀가되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문제를 관찰만 말고 이 문제를 풀어주는 방향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근로자가 병이났을 때나 돌발적인사고 등 여러 가지 난경을 해결하기위해 사회보장제도가 西歐 諸國家에서 시행되고 있는데, 이것은 한 가톨릭신자가 삐오 11세의 社會문제에 대한 회칙 「과드라제씨모 안노」(1931年)를 보고 창안해낸 제도인 것이다. 이와 같이 가톨릭신자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알고 이것을 실질적으로 현시대에 적용하여 勤勞者들에게 안정을 가져다주고 마음놓고 인간으로서 노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어야 할 것이다.
산업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인간이 산업을 위해 있지 않다. 그리고 인간은 노동함으로써만 인간구실을 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사상을 따르는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