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그리스도 성체」 축일이다. 해매다 이때를 당하면 연례적인 성체거동을 한다. 또다른 신심행사를 한다. 여하튼 성체께 대한 사랑과 존경심을 표하고 있다. 성체성사의 신비성은 성 토마스 아뀌나스가 말한것처럼 필설로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누구든지 신자라면 성체성사가 모든 신심의 중심이요 모든 영신활동의 원동력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성체는 지상의 신앙생활의 제일차적 대상이요 전부라고 해도 절대로 과언은 아니다. 우리는 우상숭배자는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의 권위로 하느님의 지상의 현존으로 우리를 보살피신다는 증거임을 믿고 감각을 초월한 순수한 신앙으로서 성체안에 생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쁨을 간직하고 있다. 모든 착한 영혼의 영성생활의 노력과 세기를 통한 교회의 노력도 모든 믿는 이들의 마음이 어떻게 성체안의 그리스도와 일치할 수 있게 하는가에 집약된다. 공의회의 전례계획이나 그밖에 모든 교령도 직접 간접으로 이런의도에서 점철되었음을 모든 신자들은 똑똑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성체성사안에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와 나, 이것이 나의 지상 생활의 지상 명제이다. 성체성사는 가톨릭의 중심이요 또한 특성이다.
우리는 차제에 모든 갈라진 형제들의 성체안 일치를 염원하면서 기도한다. 그러나 성체안에 일치는 모든 선의의 노력과 형제적 대화의 최종목표임을 분명히 말해야겠다.
성찬예식과 가톨릭의 성체성사는 반드시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소위 말하는 「인터 코뮤니온」은 현상태에서는 명백한 선을 그어야 하며 기구와 노력으로서 바로 일치가 이뤄지도록 해야겠다.
특히 「바티깐」 제2차 공의회 이후 성체성사에 대한 일반신심이 점차로 불투명하게 흐려지는 경향마저 있음은 그 본의를 전혀 알아듣지 못한 통탄할 일이라 하겠다.
표현상의 급격한 변화로 일반신자들의 마음을 쉽사리 흔들리게 한다는 것을 간파해서는 안된다. 점차로 일반 본당에서 성체 앞에서의 성시라든지 주일 성체강복 성체조배 강조 특별한 48시간 조배권장 등이 흔적을 감추고 있는 것은 어딘가 사목자의 결함에서 기인되지 않나 심히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신자들의 복잡하고 다난한 사회생활의 실태를 전혀 참작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사회생활에 시달리는 신자들에게 오히려 신의 위안을 효과적으로 누릴 수 있는 기회와 방법을 모색하는 일은 실로 시급하고 중요하다 하겠다.
6월은 예수성심성월이다. 예수성심은 어디까지나 상징이며 바로 성체를 지칭한다. 성심이란 우리동양인에게 잘 맞지 않는 표현인지도 모른다. 성체안에 신비스럽게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자체를 더욱 잘 드러낼 수 있는 표현이 아쉽다. 성심성월보다 차라리 성체성월로 개칭하여 모든 믿는 이를 「마음의 성당」으로 그리고 「감실」로 이끌도록 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