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2·3년래 거의 글은 낙동강변 왜관(倭館)집에 들어앉아 쓴다.
나의 서재 마루에서는 강이 훤히 내다보인다. 연전에 진주(晋州) 시인 설창수(薛昌洙) 형이 왔다가 관수재(觀水齋)란 당호를 짓고 훌륭한 현판까지 새겨 보내주었다.
한문으로 물 「水」는 마음 「心」과 한뜻의 글자여서 나의 서재에는 똑떨어진 이름이다.
내가 연작시(連作詩) 「밭」 백편을 끝내고 작년 봄부터 시작한 것이 바로 「강」이다. 현대시학(現代詩學) 지난 5월호에 10편을 발표했지만 내 노트에는 그럭저럭 30여편이 된다. 내가 강을 새 연작의 소재로 삼게된 것은 강가에서 예수아기를 업어 건넜다는 그리스도 폴 성인의 일화가 크게 작용하였다. 누구나 잘 아는 얘기지만 몇번 거듭 듣고 해도 구수하고 흥그러운 얘기니 여기에도 다시 한번 옮긴다.
『옛날 서양 어느 더운 지방에 굉장히 힘이 센 젊은이가 있엇다. 그는 일찌기 고향을 떠나 각 지방을 돌면서 힘겨루기를 하며 자기보다 힘이 센 장사를 만나기가 소원이었다. 그러다가 만난 것이 마귀(?깡패)였다. 그래서 그는 마귀를 두목으로 삼고 온갖 악행과 행락을 일삼으며 세상을 돌아다니던중 그 어느날 황혼 어느 강가에 다다른다.
그들은 그날밤 강변 어떤 은수자(隱修者)의 움에서 묵게되는데 두목은 그 움안에 걸린 십자가상을 보더니 2만 벌벌떠면서 『나는 저자한테만은 당할 수가 없다』고 실토하고 고만 뺑소니를 치고 마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새로운 강자(强者?)를 알게된 그는 이제 오직 그 실물(예수)을 대하기가 유일의 소원이 되었다. 은수자의 권고대로 그 이튿날부터 세상을 다 끊어버리고 강을 왕래하는 사람들을 업어건너주는 것을 자신의 소임과 수덕(修德)의 길로 삼은 그였지만 달이 가고 해가 가고 그의 새 두목인 예수는 그 모습을 좀체 나타내지를 않았다. 차차 그도 늙어갔다.
이런 어느날밤 몹시 날이 궂은 밤 이슥해서 누가 찾길래 나가보니 남루한 차림의 한 어린소년이 강을 건너 달라고 애원했다. 그는 군말없이 등을 둘러대 소년을 업고 물에 들어갔다. 그런데 물살이 센 강복판에 이르렀을때부터 등은 차차 무거워져서 그만 소년의 무게로 그가 물속에 꾸구라질 지경이었다. 온세계를 자기 등에다 얹은듯한 무게에 터덕대면서 간신히 대안(對岸)에 닿은 그는 소년을 떨어 트리듯 내려놓고 휙들쳐셨다. 그 찰나! 놀라운 일이었다. 거기 모래사장에는 그가 그렇듯 그리던 아기 예쑤가 찬란한 후광에 쌓여 미소하고 있지 않은가!』
그 출생지와 연대도 자상치 않지만 그 성인을 주보로 한 성당이 강생후 452년 「챨케돈」(CHALKEDON)에 섰다니 아마 초대교회시절의 인물이라고 짐작된다.
저러한 그리스도 폴의 전반(前半) 생애와 삶이 어쩌면 비슷한 나는 이 낙동강을 저와 같은 회심(回心)의 일터로 삼고 시를 쓸 작정이었다. 물론 나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난 마들을 업어건너주기는 커녕 나의 사랑하는 막내딸을 업고 실개천을 건널 힘도 용기도 없으며 저 성인처럼 세상을 끊어버리기는 커녕 뻔질나게 서울을 오르내리며 아직도 세사(世事)와 속정(俗情)의 밧줄에 칭칭감겨있다.
이러한 나에게 훌륭한 「강」이 써질리 만무다. 편마다의 시는 그 상념이 구지레 하고 허접스럽다.
강4
바람도 없는 강이
몹시도 설렌다.
고요한 시간에
마음이 밑부리부터가
흔들려 온다.
無常도 우리를 울리지만
安穩도 이렇듯 역겨운 것인가?
우리가 사는게
이미 波汶이듯이
강은 크고 작은
물살을 짓는다.
이것은 시라기 보다 나의 심경의 고백이다. 그런가하면 현실을 보는 눈도 결코 온당치만은 않다.
강7
5월의 숲에서 솟아난
그 맑은 샘이 여기 연탄빛 강으로 흐른다
(이하 생략)
강에서는 존재의 내면에만 눈을 돌리려 했으나 이렇듯 현실에 향한 고발이 튀어나온다. 깊이야 어떻든 그래도 더 많이 죽음과 내세와 같은 인식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강10
저 산골째기 이 산골째기에다
육신의 허물을 벗어서
흙 한줌으로 남겨 놓고
死者들이 여기 흐른다.
그래서 강은 뭇 인간의 混願과 鳴_을 안으로 안고 흐른다.
머지않아 나도 여기를 흘러가며 지금 내 녚에 앉아 낚시를 드리고 있는
이 작은 애의 그 아들이나, 그 손주놈의
무심한 눈빛과 마주치겠지.
그리고 어느날 내가 다시 오늘 이 자리에 讚美만의 모습으로 앉아있겠지.
마치 이 시는 불교의 윤회설(輪廻說) 비슷해졌으나 인류와 지상의 완성이 곧 천국이요, 또 우리의 부활도 그 안에서 이루어 지리라는 우리의 신학적 인식과도 과히 배치되지 안을줄 안다. 이제 『강』을 백편만이라도 쓰기엔 아직 몇년이 걸릴지 모른다. 더우기나 그리스도 폴의 강이 되려면 나의 앞으로의 왼 삶을 온전히 다바쳐도 이루어질지 의문이다. 그러나 오직 그 성인의 단순 소박한 회심과 수덕을 본받아 나가노라면, 아니 항상 머리에 떠올리기만이라도 하면서 시를 써나가노라면 내시도 그 어느날 구원의 빛마저 보지 않을까 믿고 바라며 해나가는 셈이다.
具常(詩人 · 本社論說委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