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일이지만 美國의 어느 젊은 婦人이 귀여운 아기를 낳았다. 그런데 같은날 그 婦人이 즐겨 듣던 라디오의 連續放送劇의 女主人公도 아기를 낳았다. 이 婦人은 自己가 낳은 아기의 이름을 連續放送劇의 女主人公의 아기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마가렛」이라고 불렀다. 이 婦人은 放送劇의 女主人公에게 많은 好感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連續劇의 女主人公이 그 아기를 귀여워하듯이 더없는 母性愛로서 自己 아기를 愛之重之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 안가서 劇의 아기는 죽고 劇의 女主人公은 몸부림치며 슬퍼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 婦人은 自己 아기가 죽었다고 하며 이 루 말할 수 없이 슬퍼하면서 울고야단을 하였다. 그 婦人의 아기는 그 婦人 바로 옆에서 아주 健康한 모습으로 잠을 자고 있었는데 말이다.
이 光景을 보고있던 옆집 婦人이 當身 아기는 죽지않고 當身 바로 옆에서 잠을 자고 있다고 몇번이고 일러주었으나 그 婦人은 옆집 婦人의 이런 말을 곧이 들으려 하지 않고 『그런 거짓말을 해도 쓸데가 없어요. 내 아기 마가렛은 틀림없이 죽었어요. 나는 마가렛이 죽었다는 것을 라디오에서 내귀로 똑똑히 들었어요』하며 울며 슬퍼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그후 얼마 안가서 그 婦人은 精神病院의 身勢를 지게되었다.
이것도 美國 어느 地方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다. 어느 劇團에서 惡役만을 맡고 훌륭한 演藝로서 그 役을 잘 해내는 한 연극배우가 있었다. 그런데 그 배우가 어느 地方에서 巡廻公演中 그 연극을 구경하러온 한 靑年에 의해서 사살되었다. 그 靑年은 경찰서에서 살해 동기를 묻는 수사관에게 몹시 興懷된 語調로서 『그와같은 惡당을 보고 그대로 내버려둘 수가 있겠느냐』고 反問調로 대답을 하였다.
自己가 즐겨듣던 連續放送劇의 女主人公의 아기의 죽음을 그 이름이 같음으로 인해서 自己 아기가 죽었다고 믿고 슬퍼하고 몸부림치는 부인이나 惡役을 맡은 연극배우를 그 연극의 主人公 바로 그 當事者로 믿고 그를 射殺한 靑年이나 다같이 정상적인 정신의 소유자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위와같은 극단적인 예에는 屬하지 아니한다고 하더라도 정도의 차는 있을망정 우리도 어느모로 보아서는 이와 비슷한 記號(言語)的 意味만의 世界에서의 生活을 하고 있다고 할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을 말로써만 꾸며가려고 하는 生活, 그리고 지나친 形式에의 配慮 땜누에 그 內責을 저버리려고 하는 生活, 또는 儀式의 번거로움이 그가 상징하는 참뜻을 흐리게 하고 멀리하게 하려고 하는 生活이 우리를 評價 착각에 몰아넣지 않는다는 保障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記號活動을 通해서 記號와 記號가 象徵하고 指示하는 것과를 辯識하고 그 辨識에 따라서 行動할 수 있는 凌轢의 培養을 위해서 社會가 어느정도의 關心을 갖고있는지 자못 궁금한 바가 있다.
姜顔熙(서울家庭法院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