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가지가 다 잘린 프라타나스는 마치 자꼬메띠 그림속의 「人間群像」 처럼 晩秋의 황량한 아스팔트 위에 줄지어 서있다. 『자연은 形像으로 생각한다』는 말이 있지만 앙상한 프라타나스나무야말로 불안과 허탈에 허허로이 서있는 現代人의 形像하고 있는가하면 각박한 빌딩의 틈바귀를 누비고 지나가는 실제의 인간은 아무 생각없이 단순히 살기위해 사는 것만 같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맑은 대기를 긋고 가는 먼 高壓線, 벌판에 쌓인 금빛 벼낟가리 그사이 회상처럼 뻗어가는 들길, 인적없는 숲속엔 무르익은 열매와 잎이질 것이다. 조락은 그 자체 別離요. 時限이요. 비애이지만 자연의 결말은 오히려 아쉬움없이 흐뭇한 충만으로 落下한다. ▲소크라테스는 『참다운 철인은 항상 죽는 일의 실천에 몰두하며 따라서 모든 사람 가운데 죽음을 가장 덜 무서워 하는 자』라고 했다. 그러나 샘의 욕구의 소용돌이 속에 영일이 없이 밀려가고 오는 도시민들을 보라. 그들중엔 아무도 장차 자기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의식조차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현재 살고 있는 한 영원히 살것만 같이 오직 현실추구에만 열중한다. ▲그들은 소크라테스처럼 죽음을 달관한 나머지 죽음과는 상관없는 표정들인가. 아니 차라리 그들은 죽음이 가장 두려운 나머지 죽음을 철저히 외면하는 것이다. 이 풍성하고 편리한 물질문명, 이일락, 비단보에 싸서 피부끝 한점도 상처를 내어서 안될 육신을 저버리고 엉감생심 죽음을 생각하다니… ▲『너희가 생각지 않는 때에 인자는 오리라』 예수께서도 항상 우리에게 죽음을 대비하라고 하셨다. 그렇다고 그는 죽음을 草芥같이 여기는 古代영웅처럼 용감무쌍하게 무감정한 죽음을 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을 무서운 형벌을 목전에 두고 「죽기까지 근심」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처럼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약점이요. 과제인 죽음자체의 오뇌를 극한까지 몸소 실천했고 그 죽음의 결과가 무엇이라는 것도 몸소 보여주었다. 죽음은 우리의 현실이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진지한 대결에서만이 참다운 삶은 이루어진다.
▲11월은 죽은 영혼을 위로 하는 달이지만 실상 자연처럼 진실하고 충실하게 살다간 영혼을 돌아볼 때 오히려 산이들에게 위로와 교훈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