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老 추기경 샬·쥬르네라고 하면 대신학자의 한사람으로(특히 보수파)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겸허하고 신심깊은 사생활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십여년전에 그의 바로 옆방에 공부하는 몸으로 2년 가까이 함께 살아본 일도 있고 그후 같은 F市에 살면서 귀국하기 전까지 자주 노상에서 만나는 일이 있어 아직도 F시를 생각하면 그분의 인상이 자연 떠오른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내가 그분 옆방에 기거를 정하고 있을 때(F대신학교) 그분이 「몽쎄녀르」이라는 것을 미쳐 몰랐다. 그의 방문입구에 써붙인 명패가 쥬르네 신부라고만 있어 늘 인사할 때 『신부님 안녕하십니까』하면 그럴 때마다 싱글 싱글 웃으며 『오, 나의 꼬마신부!』(무척 어려보였던 모양)하고 대답했다.
매일 아침식사는 우리들의 미사시간이 일러서 6시반에 둘이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이 그분이 「타이블」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다음날아침 식당입구에서 만나 『봉쥬르 몽쎄르』(몸쎄르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를 건넸더니 그는 인사를 받지 않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저 식당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식사는 해야 겠기에 같이 앉았으나 내가 무슨 실례라도 했는가 싶어 불안하던 차에 낮이되어 교장신부님을 복도에서 만나 답답한 심충을 토로했더니 웃으시며 하는 말이 그분은 평소 「몽쎄녀르」라는 존칭받기를 그렇게도 싫어한다는 것이다.
다음날 아침 그분을 다시만나 전과 같이 『신부님 안녕하십니까?』했더니 아니나 다를가 손자 대하듯이 다정하고 전과같이 식탁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도 했다. 몇해가 지나서 그는 바오로 6世에 의해 붉은 모자(추기경)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또 한가지 「에피소드」가 생겼다. 추기경이 된 다음에도 신학교 자기 방에 그대로 있게 해준다는 조건하에 붉은 모자를 받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바오로 6世로부터 보장을 받고 추기경이 되었다.
그후 F시 노상에서 만나면 그의 행색은 추기경이 되기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초라한 것이었다.
한번은 우체국에 들어서니 그는 우표를 사려고 줄지어선 사람들 틈에 끼여 자기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분 뒤에서서 인사를 건넸더니 눈을 내려뜨고 사념에 잠겨 인사하는 것도 몰라본다. 더 귀찮게 굴지않는게 좋겠다싶어 뒤에 서서 그분차례 때 무엇을 사는가 보았더니 우표 한장을 사서 써가지고간 편지에 붙이는 것뿐이었다.
F시에서 3「킬로」 떨어진 곳에 작은 순례성모성당이 있다. 소문에 의하면 추기경이 되던날로부터 그분은 F시에 있는 한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점심 후에는 도보로 이곳에 기도 바치러 다닌다는 것이다.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이 순례시간을 맞추어 따라가며 이야기하는 것이 제일 적당하다는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한번은 나 자신 차를 몰고 같은 성당에 순례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도보로 걸어가는 늙은 추기경이 눈에 띄이기에 차를 멈추고 모실 뜻을 표하니 손을 흔들어 『노!』하시는 것이었다.
또 한번 얻어맞은 것 같아 이제 생각해도 쑥스러운 기분이다. 겸허한 늙은 사제 추기경의 말없는 교훈을 회상하면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이 다시 실감난다. 『여러분 중에 첫째가 되고 싶거던 말째가 되십시오』(마르꼬 9·35)
李鍾興 신부(대구대교구 상서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