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가 희망을 가지고 산다. 희망이 없는 인간은 살았을 지라도 죽은 인간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희망은 그 중추역할을 하고 있다. 아무리 비참을 극한 절망에 빠졌을 지라도 그가 살고 있다는 그것은 곧 희망이 그 안에 내포되고 있음을 뜻한다. 인간이 절망의 極에 달했을 때 그는 생존을 포기하게 된다. 요즈음 신문 3면을 메우고 있는 갖가지 자살사건은 이러한 人間의 絶望을 단적으로 表示한 것이라 하겠다. 그 궁극적인 심층심리에는 더할 수 없는 절망이 깃들여 있는 법이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워는 『人間은 희망없이 살수 없고 또한 人間은 그 희망을 달성할 수 없기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러므로 人間은 고통이다』라고 定義했다. 즉 인간은 희망하는 동물이요, 희망은 언제나 신기루와 같이 채워질 수없는 假象의 것이므로 人間에게는 괴로움으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에 있어서 인간은 괴로움 자체이며 따라서 하루라도 빨리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행복한 것이며 보다 더 행복한 일은 아예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일이라 했다.
이러한 모순된 三段論法이 한때는 人間社會에 眞理인양 받아들여짐으로써 많은 多感한 靑少年들을 자살로 誘導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삐뚤어진 생각이나 일그러진 人生觀은 올바른 희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데서 온 不幸한 派生物이다.
그럼 올바른 희망이란 무엇인가? 우리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고 우리가 그 희망의 이유 때문에 삶의 보람을 만끽할 수 있는 희망이라야 한다. 그럼 그러한 희망은 어디에서 주어질 수 있겠는가? 말할 것도 없이 가장 진실하고 가장완전한 분의 明確한 약속에 의한 희망이라야 그러한 기쁘고 벅찬 보람을 안겨주는 희망일 것이다.
자기 아버지가 한 약속에 대한 어린아이의 기대는 얼마나 크고 즐거운 것인가! 그 아이는 아버지의 약속에 대해 조금도 의심없이 꼭 이룩해 줄 것을 믿으면서 아버지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날을 얼마나 큰 기쁨으로 기다리고 있는가를 상상해 보라.
우리주님에 대한 희망은 바로 이러한 희망이기에 기쁘고 환희에 넘치며 삶의 보람과 행복을 절감하며 높은 次元에서 가치 있게 살아가는 것이다.
金蒙恩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