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슬한 가을바람에 黃菊이 소담스런 꽃망울을 터뜨릴 때쯤부터 시작되는 결혼시즌이 쌉쌀해지는 날씨를 따라 요즘한창 그 막바지를 장식하고 있다. 하룻동안 수십쌍을 맺어주는 소위 大婚姻날 예식장마당은 그야말로 구름같이 몰려온 사람물결이 어지럽도록 현란한 꽃바다를 이룬다. 혹은 행복한 표정으로, 혹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新郞新婦들은 예정된 차안에 착석하여 예정된 「코스」로 조용히 떠나가고 어느 틈에 부쩍 長成한 그들의 등을 바라보는 부모친지들의 눈길엔 사뭇 뻐근한 감회가 어쩔 수없는 고속으로 적막히 익곤 한다. 『석달 蜜月에 삼년싸움에 삼십년 참음이 결혼』이란 속담이 있거니와 어떤 방법을 통해서건 일단 結婚이 성립된다는 것은 찰나적인 陶醉일수도 희롱일수도 없는 구체적 現實의 수용을 의미함이요, 그만큼 撤回할 수없는 嚴肅性을 내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未信者는 논외로 하더라도 일부신자 청년들의 결혼에 임하는 자세엔 다소 반성할 점이 있는 것 같다. 내일 결혼할 사람이 오늘저녁에야 불야불야 사제를 찾아와서 관면혼배를 요청하는 따위 경우가 종종있다는 것이다. 각각 다른 風土속에 자라온 한男子와 한女子가 하나의 結束에 共生하길 선언한다는 것, 더우기 그것이 서로의 意識이 서로를 죽이지 않는 獨自性을 유지하면서도 상호보완적이고 발전적인 에너지를 授受함으로써 兩者가 서로 自己完成의 길로 나아가야하는 課業이라면 도무지 그렇듯 아무렇게나 준비되고 선택될 수 있는 쉬운 일일수가 있을까?』 ▲『크리스챤적 혼인은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상징하는 것이며 크리스챤적 독신생활은 성세성사로 주어지는 부활의 신비를 완성하는 특별한 방법이다』 어느 길을 택하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온갖 善의 근원인 神을 긍정하지 않고서는 자기 存在를 설명할 수없는 生活을 이룩해 나가는데 있다. 眞髓는 오직 眞我의 實現이며 결혼은 그것을 이루려는 한 方法으로서의 肯定이 아닌가. 결혼의 내용이 무엇보다 誠實과 忍苦의 德이 될 수밖에 없는 所以는,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연애상태를 超脫하여 보다 높고 궁극적인 가치에의 사랑으로 날로 나아감이 要求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