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한 젊은 富者에게 『가진바를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하신 말씀이 잇다.
비록 이 젊은이가 이대로 實行하지 못했지만 이 勸告는 풍부한 結實을 가져와서 淸貧의 誓願의 바탕이 되고 많은 修道者들의 길이 되고 있다. 성서는 이 젊은이가 왜 이 勸告를 따르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우리가 흔히 상상할 수 있듯이 겁이 나서였을까? 인색해서였을까? 반드시 그렇게만 단정할 수 는 없겠다. 扶養家族이라든가 義務라든가로 해서 모든 것을 버리기가 事實上 不可能했는지도 모른다. 社會에서 生活하는 우리 역시 모든 것을 버리고 이같은 完全한 가난의 德을 걸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富의 노예가 되지말고 自由로운 자세를 지니고 산다는 것이 필요하다. 巨大한 偶像이요 地上의 神인 돈에게 농락되는 社會相을 본다거나 가깝게는 집안의 支出을 메우기가 힘들때 우리는 흔히 돈을 저주하고 욕한다. 이같이 風俗의 壞亂者인 돈을 비난하거나 卑하고 亂暴한 言動으로 대한다고 해서 돈에서 解放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人間關係의 상징적 支援이며 勞動의 結實인 돈의 人間的 社會的 意味를 되찾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런데 現代人에게 인색의 유혹은 豫想치 못했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즉 돈에 직접 관련되지 않은 양 미묘하게 對象이 바뀌어 勞動에 관련되어 있음이 주목할만하다.
『일하라!』 얼마나 敎訓적인 口號인가! 그런데 이 敎訓이 자칫 돈을 모으라는 뜻이 되고 있지는 아니한지? 좀더 일하자. 그리하여 좀더 모으자는 意圖는 찬성할만한 유혹이요 必要한 정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이 소용돌이 치는 우리 社會人의 生活을 全部 차지하고 나선다면 이 또한 일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예수께서 피곤한 하루끝에 「베타니아」의 마리아의 집에 와서 쉬실때 마리아는 앉아있고 말따는 일손바삐 돌아가며 앉아있는 마리아를 원망한다. 그때 예수께서는 예수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마리아를 꾸짖지 않으시고 일손만 서두르는 말따를 꾸짖으셨음은 불이나게 돌아가는 現代人에게 주는 커다란 覺醒劑라고 생각한다.
洪承玉(서울大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