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를 받은 가톨릭敎人을 外敎人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만큼 난처할 때가 없다. 이마에 천주성삼의 聖名이 적혀있는 것도 아니요, 가톨릭信者라고 키가 남보다 더 크다거나 팔이 하나 더 붙은 것도 아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외모상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가톨릭敎人도 外敎人도 다같은 人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敎人과 外敎人間에 무슨 差異가 있느냐고 묻는 이가 많다.
이 질문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가톨릭이라면 남보다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을 테니 가르쳐달라는 뜻일 수도 있고 가톨릭信者라해 서 外敎人 보다 아무것도 더 낫다거나 다른 것이 없더라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가톨릭신자가 더 못할 때가 있으니 하필이면 가톨릭이 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표명하기도 한다. 『아무게는 가톨릭신자인데도…』하고 가톨릭은 항상 비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실상 世人들은 가톨릭인 우리를 볼때 자기들이 갈망하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생활 우리 안에서 찾고자하는 것이다.
그러면 가톨릭敎人은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가톨릭의 특수성을 나타내야 하는가? 그것은 무엇보다 사람을 실천하는 생활이며 사랑의 생활은 世人에게 道德生活과 良心的生活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가톨릭敎人은 누구보다 道德的이고 良心的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主日미사에 참여하고 성사를 보고 성당에서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였댓자 生活이 非良心的일때는 그리스도의 弟子라 불리울 수 없을 뿐더러 가톨릭이란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예수를 파는 유다스도 많고 위선적인 바리세이도 많다.
11月 2日자 「전남매일신문」에 光州大建神學校經理室에 종사하던 李모씨와 숲모씨가 敎皇廳서 보낸 給食費를 횡령한 혐의로 수사중이라는 事實이 3面 톱記事로 報道되었다. 이 報道의 事實與否는 莫論하고어쨌든 敎會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또 어떻게 생각하면 이두사람은 운이 나빠서 걸려든 不幸兒인지도 모른다. 실상 敎會가 전하는 신앙에는 關心이없고 敎會의 財産에만 탐욕을 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누가 알겠는가? 20세기의 유다스도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받아먹고 남보다 더 열심하며 가난한자를 남보다 더 생각하는 것처럼 말할 것이다. 그뿐아니라 오늘의 유다스 중에는 남에게 존경과 신뢰의 대상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神學生을 양성하기 위한 給食費는 누구에게서 나온 것인가? 게중에는 양순하고 가난한 신자들이 한푼한푼 모아서 바친 祭物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것을 횡령하였다면 참으로 큰 罪人이다. 그리고 또 이러한 事件이 誘發되었을 땐 敎會도 反省을 해야 할 것이다. 敎會기관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우개선과 敎會運營의 재검토가 그것이다.
신앙을 미끼로 정당한 대우없이 일꾼을 고용한다는 것은 사회정의에 어긋나는 착취행위며 또 敎會機關이라 해서 경영체제를 갖추지 않고 운영하는 것도 불합리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改新敎에서는 「敎會經營」이란 冊子까지 발간될 정도로 合理的經營을 모색하고 있는데 反해 가톨릭은 人物本位經營의 체제를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다. 見物生心이라고 현실에서 생활에 쫓기다보면 財物보고 탐내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을 테니 고용주는 먼저 이 貪慾을 除去하는 合理的인 方法을 使用함이 타당할 줄 믿는다.
그리고 어떤 事件으로 醜聞이 생겼을 때 敎會의 명예 때문에 無條件덮고 감추려는 것은 上策이라 할 수 없다. 敎會의 명예를 우려하다가 敎會自體에 손상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敎會全體를 위해서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一部의 手術을 敢行하는 것이 賢明한 처사일 것이다.
敎會는 앞장서서 부정부패를 根絕하도록 노력해야하며 특히 한국 같은 상황에 놓여있는 敎會는 重大한 使命을 띠고 있다. 그것은 社會秩序를 바로 잡기위해서는 누구보다 교회가 솔선수범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를 복지사회로 만드는 것은 경제개발만으로 되지 않고 오히려 人間改造가 더욱 시급하다. 즉 올바른 人間을 形成하는 것이다. 古代부터 한국人은 道德的으로 우수한 民族이라고 한다. 그러나 現代에 이르러 道德은 퇴패일로에 있고 부정부패로 사회는 위기에 직면한 느낌이다. 이때 道德을 보존해주어야 할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톨릭敎人이다. 이러한 使命感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가 가톨릭이 된 것은 無意味한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敎會가 이 땅에서 盛하느냐 衰하느냐하는 문제는 가톨릭歌人 各者의 良心이 얼마나 올바르냐하는데 달려있고 따라서 한국사회를 얼마나 정화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