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던 38선을 넘어 붉은 군대가 이땅을 침범한지 벌써 19년이 되었다. 좌왕우왕하는 어머니 품에 안겨 젖투정만 부리던 철부지들이 벌써 청년이 되었고 팔목이 아프도록 끌려다니던 개구장이들은 제법 애기의 엄마 아빠가 되었다.
인생에 망각이 없었던들 세상에 웃음이 사라진지 오래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40대 이상의 기성세대는 그 망각 속에서도 가끔 잊혀지지 않는 그 당시의 일들이 생생히 떠올라 무거운 침묵에 잠기는 경우가 많다. 기록을 읽거나 이야기만 듣고 더듬는 젊은이에게는 그 실감이 날리가 없다. 더구나 공산주의의 이른 비판이나 남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고 그당시의 일들을 이해하려든다는 것은 더욱 철부지 같은 소리다.
화가들은 전쟁의 비참을 그릴때에 폐허가 된 도시나 죽어 넘어진 사람들을 그린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비참한 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가슴 속의 폐허이다. 그래서 붉은군대가 노리는 최후의 아성도 살아남은 자유인의 가슴인 것이다. 결국 자유인의 가슴이 공산주의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매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찌기 플라톤은 사람이 사념(邪念)을 떠나 바르게 사기 위해서는 물욕을 버려야 한다고 했고 그러기 위해 공산주의를 제창했던 것이다. 즉 즉 그것은 가난하게 살기위한 공산주의였다. 그러나 칼 맑스는 그와는 정반대로 사람이 재물욕을 고르게 만족시키는 방법으로서 붉은 공산주의를 제창했다. 그의 유물사상은 사람을 물욕의 화신(化身)으로 만들어 놓고 그 싸움 속에서 평등한 분배를 위해 공산주의를 합리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공산주의는 물욕의 화신인 사람들이 모여사는 사회서만 자랄 수 있고 또 그런 사회이기에 인간의 존어이니 품위니 양심이니 하는 따위는 고려될 여지가 없다. 모든 생명의 가치는 오로지 그것이 그 사회의 물욕을 충족시키는데 얼마만치 공헌할 수 있느냐에 따라 평가되고 처리된다. 그 사회의 주인은 백성이 아니라 노동과 생산이고 그를 대행하는 자가 공산정권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근20년동안에 우리사회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특히 경제개발과 국방력의 강화이다. 백성이 잘 사랑야 하겠고 또다시 6·25가 없어야 하겠기에 다행한 일이다. 아직도 국민소득이 더 늘어야 하겠고 국방력도 더욱 강화되어야 하겠다. 그러면서도 문제는 오늘 경제성장 속에서 백성들의 가슴 속에 어떤 변화가 일고 있느냐는데 있다.
재물과 힘을 신으로 모시고 인간의 가치와 인생의 목적을 그속에서 찾으려고 한다며는 반공의 아성이 무너지고 말기 때문이다. 향락이 탐나서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반공사상을 가지고는 붉은 군대의 침략을 막아낼 가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는 「제2경제」의 개발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그런 차서(次序)의 뜻이 미묘할뿐 아니라 그 운동이 과연 실효를 거둘 수 있을까는 크게 문제된다. 인간과 그 사회의 발전은 적어도 정신개발과 경제개발이 함께 병행되어야 하고 그의욕과 방향의식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차서와 균형이 이그러졌을 때에는 또다시 6·25의 위협을 받아야 하겠기에 그 19주년을 맞은 오늘의 모든 국민은 거듭 각성해야 하겠다.
6·25의 전주일은 특히 이북의 침묵교회와 모든 형제들을 위해 기도드리는 주일이다. 우리는 내 몸 같이 사랑해야 할 공산치하의 신자와 동포들을 위해 정성을 다하여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