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는 사랑의 반대가 미움이라는데 영국의 학슬레이는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증오도 사랑처럼 관심이 있어서 생기는 것이고 이들이 한손의 등과 바닥 같으니 사랑의 반대라고 할 수 없다. 밤이 낮의 반대가 아니듯 사랑도 미움도 일종의 관심이니 사랑의 반대가 무관심인 것은 사실이다. 관심이 있어야 사랑이 싹트고 관심이 커야 사랑도 두터워진다. 관심의 극치가 결국 사랑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이것은 눈물이 나니까 운다는 것과 우니까 눈물이 난다는 한가지의 두 논리 같아서 관심과 사랑은 분리시킬 수가 없다.
좋아하는 것이 관심이 있기 때문이라면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무어그리 좋고 언짢을 것이 있을리 없다. 무관심하니까 生心도 의욕도 없고 따라서 이에 따르는 행동도 없고 그저 無爲다.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에게 무관심할 때 성의가 없다고 하고 냉정하거나 차갑다고도 한다. 『너 밥 먹었니?』하는데도 『응』하고 『너 밥 안 먹었지?』해도 『응』한다면 무지나 무관심을 나타내는 것이고 이것이 의식적일 땐 묻는 이를 무시하는 결과가 된다. 여기서 무슨 애정이 생겨날 리가 있을까? 나의 관심거리에 무관심한 사람을 보면 섭섭도 하고 섧기도 하고 때로는 그 사람과 담을 쌓아 절교하기에까지 이른다.
미술가나 음악가가 그림이나 음악에 무관심한 사람을 우습게보듯 종교에 무관심한 사람을 아마 신자들은 한심스럽게 볼 것이다. 마찬가지로 神에게 관심이 없는 신자를 神은 얼마나 측은히 볼 것인가? 이보다 더 답답하고 괴로운 일은 없다. 손써볼 여지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도외시 또는 포기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생김생김이 사람이지 목적이나 다를 것이 없다.
그러니 무관심자는 죄인보다 더 무섭고 무관심만큼 무서운 것도 없으며 그것은 바로 지옥, 사랑이 없는 곳이다. 우리가 사는 가정에 사회에 이런 무관심이 깃들어있다면 그 가정 그 사회는 죽어있다. 생명이 없다. 무관심의 결과가 이렇다. 보다 더 명랑하고 다복한 사회를 이룩하려면 서로 간에 누구나 다 이런 무관심을 원치 않을 것이고 그런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하게 되는 사랑마저 아니할 뿐만아니라 그 사랑을 적극적으로 마비 질식시키는 때문이다. 사람을 죽이는 殺愛者다. 메마른 가정이나 사회가 따로 있고 악한인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관심이 없으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상할 것 없다. 멀리서 뜻하지 않게 의외의 사람한데 사인만 있는 그림엽서 한장을 받았거나 내 생일에 의외의 사람한테 뜻하지 않은 선물을- 적더라도- 받았을 때 눈물겨웁도록 놀라는 것은 내게 대한 그 관심 때문이다. 그 사랑 때문이다. 관심에서 오는 사람의 습격이다.
이것이 「미리 알아차리는」 또 「앞서 가는」 이웃 사랑의 실천이 아닌가? 그리스도가 이러하셨다. 사랑의 극치인 결혼이 관심으로써 시작되고 지속되며 완성된다면 천주와의 일치도 이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사랑이 넘치고 관심이 끝없을 때 그것이 바로 천국인 것이다. 신에 대한관심, 그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종교인 것이다.
崔益喆 신부(가회동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