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전 일이다. 「프리불그」에서 「리옹」에 볼일이 있어서 「제네바」역에 내려 기차를 갈아타는데 정오가 다되었다. 기차시간까지는 아직도 40분이 남았기에 「레스또랑」에서 점심을 먹자니 주머니가 넉넉치않아 역구내서 「샌드위치」로 대신하고 남은 시간을 서성거리노라니 웬 중년신사가 다가와 『신부님 처음뵙습니다. 미사 중 저를 좀 기억해주십시오』하고 돈을 꺼내 손에 쥐어주는데 보통 미사예물의 4배나 된다.
다소 놀란 표정을 짓는 나를 보고 『신부님 사업을 하다 보니 잘못한 일이 많습니다. 신부님을 뵈오니 그 보속을 하고 싶어서』하고 멀어져 간다. 점심값을 절약한 내주머니를 낯모르는 중년사업가의 속죄선행으로 채워주시는 기묘한 천주의 안배를 음미하면서 차안에서 양심과 속죄문제를 생각했다.
그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모르나 스스로 제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고 또 기워 갚으려는 마음씨 안에 천주님의 자리가 뚜렷이 엿보인다. 남에게 잘못한 것을 천주님 앞에 잘못한 것으로 아는 양심의 자세, 천주님 앞에 속죄함이 사람 앞에 하는 속죄와 통한다고 생각하는 절대적 기준을 가진 양심행위, 분명 그리스도교 전통의 힘이라고 느껴졌다.
나는 서구인들의 주의 정신에 비판을 가하면서 동양윤리의(유교윤리) 우월성을 기회있을 때마다 강조해 오던 터라 이러한 양심문제를 놓고 볼 때 과연 동양인이 『신 앞에 내 양심』이라는 의식을 가지는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양심」이라는 낱말은 東西가 다함께 쓰고 있지만 그 자세와 기준이 과연 東과 西가 같은지 의문이다.
오랜 시간이 가고 조국에 돌아와 보니 제일먼저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지난날 생각했던 東과 西의 양심문제다. 부정부패 가짜가 범람하는 세태, 그중에도 가짜 살인음식바람에 마음 놓고 외식한번 할 수 없고 반주 한잔이 꺼려지는 현실 앞에 부정부패나 가짜제조의 주인공들의 양심이 조국근대화 이전의 문제로 느껴진다.
一國百戒니 경찰단속이니 하는 방법으로 양심문제가 해결된다고 믿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절대자 앞에 비추어진 양심』의 확립없이 양심병의 근치는 바랄 수없는 일이다. 『들키면 죄 안들키면 무죄』 『남이 나를 어찌 보는가』에 양심기준을 둔 사회라면 들키지 않는 수단만이 발달할 것이고 그 비례로 잘못을 들추어내는 방법이 느는 사회로 발전하는 도리밖에 없을 게다. 동방예의지국의 생활원리가 『사람 앞에 나』를 강조했을 뿐 『사람 앞에 보여진 自我를 넘어서 절대자 앞에 서서 본 나의 도리 나의 양심』을 밝혀주지 못했다. 그래도 우리의 옛 선조들은 『하늘이 무서워서도 악행을 해서는 안되느니라』하고 자녀들을 가르쳤것만 오늘의 사회는 하늘도 사람도 무섭지 않은 한마디로 内的 拘束力을 잃은 인간으로 발전(?)한 것 같다. 內的 拘束力을 받지 않고 사는 인간만큼 低劣한 人間이 있을까. 그러기에 이웃사촌의 시대는 가고 이웃을 못믿는 시대로 바꾸어진 것이 아닌가? 처마 밑까지 싸올린 담장과 그 위에 가시철망으로 싸감은 도시의 주택을 보면 오늘의 불신시대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은밀한 생각까지 다 아시는 천주님』을 믿는 신앙인마저도 이러한 정신풍토에서 바른 자세가 침식당하고 있음이 또한 안타깝다. 동양인의 『양심이 천심(天心)』이라고 생각하던 제 모습을 되찾을 때 그리스도교적 양심도 발판을 붙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李鍾興 신부(대구대교구 상서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