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두번째로 맞이하는 한국평신도의 날이다. 제2차 「바티깐」 공의회문서 중 교회헌장과 평신도사도직에 관한 교령은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규정하고 또 하느님의 백성인 평신도의 교회 안에서의 위치를 뚜렷하게 밝혔다. 즉 평신도는 이미 교회의 부속적인 존재이거나 성직자의 명령에 순종만하는 피동적 존재가 아니고 교회의 주인공자체이며 평신도 고유의 사도직임무를 수행할 능동적 존재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공의회가 끝난지 이미 수년을 지난 오늘날 우리한국교회에서 과연 이와 같은 교회관과 평신도사도직의 진의가 올바르게 이해되고 실천되고 있는가? 지금 여기서 새삼스럽게 그 의의를 해명할 여유가 없다. 오히려 이에 대한 그릇된 생각들을 한두가지 지적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첫째는 평신도 측에서 잘못 생각하는 것으로서 이제는 평신도의 시대가 왔다는 듯이 성직자의 행하는 모든 일에 간섭하려드는 것이다. 다음은 성직자 측에서도 평신도사도직이라면 마치 성직자의 권한 침해나 나아가서는 반성직자운동이나 하는 것처럼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극소수의 오해나 곡해에 불과한 것이고 대다수의 성직자나 평신도들은 이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현재 각 교구마다 이에 관한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진지한 「세미나」가 자주 열리는 것을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앞으로도 이러한 각자의 자체재교육이 계속 거듭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 원래 평신도 고유의 사도직은 세상 안에 있는 것이다.
즉 그들의 사도직을 수행할 곳은 바로 교회 밖의 사회인 것이다. 그것은 가정이고 직장이고 자기가 살고 있는 이웃 등등의 환경인 것이다. 이런 곳들은 성직자들의 손길이 미칠 수없는 곳이요, 오직 평신도들만이 활동할 수 있는 사도직장인 것이다. 이곳에서 평신도들은 모름지기 자기 역량껏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그리스도의 왕국을 확충하는 직무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칫하면 평신도들은 사도적이란 교회 안에서만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수가 많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앙생활이란 교회 안에서만 있는 것으로 알고 사회생활과는 별다른 것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고유의 사도직장인 사회생활에서의 복음전파의 사명은 염두에도 없으면서 교회 안에서만 그것도 교회 운영에나 참관하는 것을 바로 시대의 각광을 받은 평신도사도직의 모습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렇다고 해서 평신도들은 교회 안에서는 아무것도 할일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평신도는 교회 안에 있어서는 먼저 성직자의 사목활동에 적극 협력해야 할 것은 물론이다. 이점에 있어서는 과거부터 성직자에 대한 순명의 정신이 투철한 나머지 비교적 잘되고 있는 편이 아닐까? 다만 문제되는 것은 교회의 운영에 관한 것이다. 평신도는 마땅히 교회의 운영에 대해 적극적,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런데 과거인습의 탓인지 지금까지는 평신도들 너무나 무관심하거나 방관적 태도를 취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오로지 교회는 성직자의 것이고 평신도는 그 명령에 순종만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그릇된 교회관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란 올바른 개념을 되찾은 마당에서 다같은 하느님의 백성인 평신도는 오직 자기 스스로가 교회의 주인공이며 책임자임을 깨닫고 그 교회의 운영에 주인된 책임을 다하도록 적극 참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랜 과거의 피동적이고 무관심했던 자세에서 갑자기 책임적 참여에로 전환함에 있어서는 먼저 그 재원인 수입면의 조달에 대해 평신도들의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 선결문제이다. 그리고 나서 또는 그리하면서 교회의 사업인 지출부면의 결정과 집행에도 같이 참여해야 한다. 만약에 이와 같은 질서를 무시하고 성직자로 하여금 돈 걱정 때문에 그 고유의 사도적인 사목활동을 충분히 할 수 없게끔 하여둔 채 평신도가 오직 교회의 사업계획이나 재정지출에만 이렇구 저렇구 관여한다면 이는 교회운영에 대한 능동적 참여란 개념을 크게 흐리게 하는 본말전도인 것이다.
위에서 대강 평신도사도직의 본 뜻과 그 실천방법에 대해 관찰해 왔거니와 성직자나 평신도가 다같이 오해나 선입관을 버리고 과거의 인습이나 고루(孤陋)한 아집(我執)에서 탈피하고 공의회의 요청인 새로운 교회관과 사명수행에 과감한 행동이 전개되어야 하겠다. 끝으로 한마디 부언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의 사회상에 비추어 사도직의 활동도 조직적 단체적으로 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고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는 각종 「액션」 단체가 있고 또 앞으로도 더 많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단체들의 종합적이고 유기적인 유대연결을 위하여 사도직단체의 협의체가 전세계적으로 국가단위로 각 교구단위로 조직되었거나 되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오직 하나인 교회의 본질상으로나 활동의 효율성으로서나 이러한 조직체의 결성이 그들의 실천목표달성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조직만이 능사가 아니고 실천이 앞서야 하겠다.
그러나 그 실천을 하기위하여 조직이 선행되거나 병행되어야 함도 사실이다. 대소 각 교구의 책임성직자와 지도적 위치에 있는 평신도제위에게가 일층의 역량발휘가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