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톨릭은 교황께 충성을 표시하고자 오래전부터 교회의 두 기둥인 사도 베드로 바오로 축일 다음에 오는 주일 하루를 「교황의 날」로 정하고 교황께 대한 강론과 미사중 그를 위한 특별기도, 또한 성화의 사업을 위한 특별 애긍을 실시해 오고 있다. 금년은 사도 성 베드로 바오로 축일과 겸하고 있으며 다음날은 교황 바오로 6세의 대관기념일이다.
교황이 누구인지 여기서 새삼스레 논술할 필요가 없을줄 안다. 다만 제2차 「바티깐」 공의회에서 교황에 관한 교회의 참신앙이 「교회에 관한 교회의 헌장」 제18조에 명시되었음을 밝혀두고자 했다. 거기 명시된 교리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 전체의 교계제도 가운데 성 베드로의 御座가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뚜렷이 했고 또 주교단과의 관계도 깊이하고 있다. 제2차 「바티깐」 공의회가 새로운 신앙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요 같은 신앙을 진보시킨 것에 지나지 않다. 이 새로운 선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교황이 주교단의 머리요 또 교회 전체의 으뜸이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깊은 뜻을 느낄 수 있다. 즉 머리없는 가정이 없는것처럼 교회에도 으뜸이 있는 것이다. 물론 절대최고의 으뜸은 그리스도시다. 그러나 교회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으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대처럼 교황의 존재가 중대한 의의를 가진 시대가 없다고 본다. 이렇게 단언한다면 아전인수격이 될지 모르나 가톨릭과 인연이 없는 많은 정치가 사상가들이 이와같은 감회를 품고 있다는 것을 경시할 수 없다.
그것은 그들도 역시 교황을 물질만능주의에 도취되어있는 현대의 인류사회의 정신적 가치의 가장 위대한 대표자요 보호자로 보기 때문이다. 교황이라면 그저 연을 타고 신자들에게 나타나 축복이나 주는 그러한 한가한 존재로 상상될지 모르나 그러나 한 나라의 통치자 치고 교황만큼 바쁜 생활을 보내는 분도 적을 것이다.
인류사회가 진보하고 있는지 의심을 품는 자도 있으나 현대의 진보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면 현대인 자신이 옛사람에 비해 통일에 동경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인간 개인은 독자적인 인격을 가지고, 민족문화도 각각 고유의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민족문화상호간에 交通不可能性의 장벽이 있다는 構造主義를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모든 인간이 獨自의 인격을 가지고 모든 민족문화가 獨自의 구조를 가지면서도 형제로서 하느님의 창조적 원의에 참가하도록 불린 것이다.
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에서 말하는 소위 더 높은 次元의 「휴매니즘」에 대해 교황은 비상한 역할을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현재의 인류는 같이 흥하느냐, 같이 망하느냐 하는 위기에 처해있다. 우리가 같이 흥하는 방책을 생각하기 위해 교황의 존재는 한가락 광명을 던져주는 자이다. 여기 이 방책을 소개할 지면이 허락되지 않는다. 결국 세계의 모든 문제의 근본은 복음정신에 있다. 그때문에 교황은 힘있는 「복음의 말씀」으로써 세계의 모든 인간에게 말한다. 현 교황 바오로 6세는 요한 23세의 유업을 계승하여 세기적 위대한 공의회의 업적을 완료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많은 파란을 불러이르킨 産制에 관한 회칙을 비롯해서 벌써 많은 회칙을 發布한 바 있다.
이러한 회칙 외에 여러 文書 · 라디오 텔레비의 「메시지」 · 선교 등은 삽시간에 전세계의 통신망을 통해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이 걷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그도 그리스도의 일군으로서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이 중책에 견디기 위해 한편의 기도를 우리에게 청하는 작은이다. 교황과 함께 교황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미사에서 교황을 기억하지 않은 때가 없다. 교황은 신자들이 자기의 의향에 따라 기도해주도록 많은 은사까지 부여하고 있다. 우리는 이달 초순에 요한 23세의 6週忌를 보냈다. 그가 서거하고 얼마후 그당시 「밀라노」의 몬띠니 대주교는 『우리는 요한 23세가 미래를 위해 열어놓은 길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생각 못할 일이다.』라고 말한바 있었다. 6년전 그가 교황으로 대관될때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의 이름을 선택했다는 것만으로도 요한 23세와 마찬가지로 신자끼리, 또 신자와 비신자끼리의 접근을 시도해 보겠다는 원의를 나타냈음을 알 수 있다. 또 평화를 위한 한결같은 노력은 그의 수많은 여행에서 엿볼 수 있다. 공의회는 물론 교회의 쇄신을 목적으로 한것이다. 쇄신도 좋지만 쇄신의 본뜻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에 드는 공의회 결정만을 따르는 자에 대해 그는 최근 경종을 울린 바 있다. 시대사조에 추종하여 교회의 가르침을 거기에 적용시키려는 이들에 대해서도 경계했다. 현대인의 임무는 종교생활의 원천인 복음정신에 소급하여 그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고처 생각하고 완전한 생활로써 그것을 사회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사도 바오로는 와야할 미래를 예감하고 띠모테오에게 『때가 오매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듣기 싫어하고 오직 귀가 소긋하야 자기 원욕을 따라 각각 스승을 연해고_며 또한 진리에 대하여는 귀를 둘이키나 허망한 말에는 귀기우리니라』고 편지를 써보낸 일이 있었다.
産制回칙에 대한 抗議, 사제독신제에 대한 反逆 그외 여러가지 新學說 등 현대의 혼란 속에서 교황은 매우 피로를 느끼는 모습을 우리는 보고있다. 이때 우리는 「바티깐」의 언덕을 바라보자 『이러한 말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이는 바위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자에 비할 수 있다』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했다. 이 바위가 교황이다. 그리고 교황을 돕는 또하나의 방법으로 그를 위한 특별애긍을 하는 것이다. 교황에게는 개인적인 금고가 있다. 이것을 교황의 가방이라 한다. 자기 뜻대로 그 돈을 사용할 수 있다. 가난한 이에게 애긍도 한다. 또 바티깐은 한 독립국으로서 세입세출이 필요하여 그것은 우리 신자들의 주머니에서 충당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약간의 애긍으로 막대한 교회원조비를 받고있는 실정이다. 여기 또한 한국 가톨릭의 면목을 잃지 않도록 좀더 분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