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은 모른다고 한다.
물은 모른다 모른다고 한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내가 이처럼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山은 모른다고 한다.
물은 모른다 모른다고 한다.
이 詩는 한 20年前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지나치게 단순하고 素朴하여 마치 옛 시골처녀의 純眞한 마음을 들여다 보는 그런 느낌이 없지가 않다. 나에게도 이런 時節이 있었던가? 사뭇 신기하기만 하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이런 마음이야말로 서정시의 가장 原初的인 마음이 아닐까 한다. 뭔가 잃어버린 은수저 한벌을 되찾은듯 한 새삼스런 느낌이다.
나는 山의 맛을 별로 모르고 자랐는듯하다. 어려서는 故鄕에 오르내리기도 하고 그 山頂에서 멀리 꿈같이 펼쳐진 閑麗水道의 그 자잘한 섬들과 아지랑이 속에 잠긴 물감을 뿌린듯한 草綠의 바다를 내려다보곤 하였던 記憶이 있기는 하나, 나는 詩에서나 다른 글에서도 山을 素材로한 일은 별로 없다. 바다는 더러 내 詩의 素材가 되어주었지만.
仁者樂山 知者樂水란 말이 있다. 이 말의 깊은 뜻을 아직 나는 모르고 있다. 山이 모든 것을 제 품에 안고 있으면서 조금도 흔들리는 氣色이 없다. 山은 그러한 德과 함께 높이 솟아 그 節槪를 굽히지 않는다. 눈이 오면 눈을 이마에 이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오직 崇高할 따름이다. 어딘가 悲壯한 느낌마저 든다. 山은 이처럼 無限한 幅, 無限한 부드러움과 함께 어떤 준엄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다.
이 준엄함은 나를 압도한다. 그것을 나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마음 한구석에서 늘 山의 그런 一面에 답답함을 느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바다는 다르다. 바다를 보면 늘 新鮮한 生의 躍動을 느기고 어떤 解放感을 느낀다. 쉬임없이 새로워지고 쉬임없이 움직이는 바다 - 그 넓고 넓은 無關心은 조그마한 日常의 執着으로부터 나를 解放케 한다.
앞에든 詩는 은연중 山과 바다에 대한 나의 以上과 같은 느낌들을 기다림이라고 하는 애절한 마음을 媒介로 하여 아주 솔지갛게 드러내 본 것이 아닌가 한다. 이때의 기다림이란 永遠한 「에로스」의 그것 - 空間的으로는 無限으로까지 擴大될 수 있는 그것 - 서정시가 가진 애매모호한, 윤곽이 희미한 그런 마음의 어떤 언저리를 보인 것이지만, 自然은 모두 이러한 人間의 마음의 몸부림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自然과 사람 사이에는 어떤 斷絶이 있다는 그러한 느낌을 이 詩는 보일려고 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斷絶感은 사람과 사람사이에서도 있긴 있는 것 같다.
『他人 속에 내가 산다는 것이 바로 地獄』이라고 한 어떤 哲學者의 말이 생각난다. 이러한 斷絶感이 사람을 孤獨의 地獄으로 때로는 孤獨의 天國으로 데려다 준다.
이 詩에서는 그러나 山은 人間인 나의 所望을 단한번 준렬하게 「모른다」고 하며 拒絶해 버리고는 自己固執을 그대로 버티어 나가는 그러한 것으로 그린 대신 바다(물)는 拒絶을 해도 「모른다 모른다」고 여운을 남기면서 보다 안타까운 몸짓을 한다고 그리고 있다. 그만큼 그의 몸짓과 앉음새는 매혹적이면서 어딘가 女性的이다. 나는 女性的인 것에 더욱 끌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나는 山을 어떻게 詩로 다루어야 할지 막막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다는 요즘도 자주 내 詩의 素材로 등장하곤 한다.
바다를 다룰때 無限히 즐겁기도 하고 愛着이 가기도 한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近者에는 내 健康을 위하여 山과 좀 親해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아는 기회있을때마다 앞으로는 山을 찾을는지 모른다. 그러는동안 나는 山의 여태껏 몰랐던 새로운 都面을 알게되고 거기 또 새로운 즐거움과 愛着을 가지게 될는지도 모른다.
金春洙(詩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