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일 전에 시내일간지에 「人權의 날」기념계획에 대해서 한갓 행사치례뿐이라는 기사를 보고 작년 在歐 당시 「人權宣言 20周年」이라는 삐르 신부님의 강연이 문득 생각난다. 人類가 世上에 살기시작하고서 서로의 人權을 존중하자고 선언한 것이며 겨우 스물한돌되는 오늘이다. 생각하면 우습기도하고 개탄스럽기도 하다. 人權을 宣言해야만하는 일이나 宣言을 하고서도 人權이 짓밟히고 있으니 말이다. 삐르 신부님은 그 강연을 한뒤 수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人權을 위하고 平和를 위한 공적과 정신은 길이 남겠지기에 여기 그분의 마지막 강연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이 기회에 되새겨 보고 싶어진다.
人權은 萬人이 異意없이 同意認定하는 것일까? 할 때 남의 人格을 존중한다는 原則에서는 모두가 같지만 존중정신의 적응이나 해석에 있어서는 믿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이다. 여기에 人權問題 以前의 문제가 있다고 한다. 人權認識의 世界的水準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아직 普及단계이고 20년이 걸려서 알려진 것은 人權이라는 낱말의 普及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국가나 文化水準에 따라 다소 差異가 있기는 하지만 認識이 좀 더 낫게 되었다고 해서 반드시人權保障이 더 잘되고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면서 은근히 西歐人의 反省을 시사하기도 했다.
앞으로 어찌하면 人權認識이 普及되고 또 人權保障이 잘되겠는가? 長久한 시간을 내다보고 人權敎育을 시켜야하는데 이것은 어떤 연구로서라기 보다 善意와 平和愛護의 마음을 기르는 것이라고 했다.
具體的人權敎育의 例로서는 우리가 남을 괴롭히고 불행하게 하는 一切의 行爲에 마음자세를 바로잡게 하는 것이다. 社長이 祕書나 사환을 급히 불러 無理한 일을 시키는 것까지도 바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無數한 形態로 남에게 無理를 要求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人權과 關聯해서 특별히 女權問題를 어찌 생각하느냐에 대해선 人權問題 外에 女權問題가 따로 더 붙는 것이 아니고 人權問題로서 더 深刻한 것이 女權問題가 아니겠는가. 女性解放을 마치 女權問題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못마땅하다면서 그가 보는 女權問題는 女性으로서 해야 할 것을 못하게 하는 것, 누려야 할 특전을 못누리는데 있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강조하는 것은 女性이한것중에 중대한 것의 하나는 여성이 바로 人權의 敎師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의 에피소드로 재작년(1967) 日本에 국제平和會議에 참가했을 때 日本記者가 묻기를 神父님이 「노벨」平和賞의 審査員이 되신다면 누구에게 평화상을 주도록 하겠느냐고 물었다한다. 서슴지 않고 自己대답이 『우리어머니에게』라고 했다한다.
그것은 자기가 현재까지 平和와 人權을 위해 관심을 갖고 일할 수 있게 된 것은 오로지 어머니의 敎育에서 얻은 힘이라고 自白했다. 결론으로 「人權」은 「平和」와 同意語이며 인권을 지키는 사람은 곧平和를 위한 사람이고 평화를 위한 사람은 곧 人權을 위한 사람이라고 한다.
얼마 후에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하늘에서는 天主께 榮光, 땅에서는 마음이 좋은 사람에게 平和』가 또다시 가까이 들려오는 것 같다. 남을 짓누르지 말고 사는 우리조국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李鍾興 신부(대구대교구 상서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