衣服을 다만 몸가림과 防寒을 위해서만 입는다고 하면 너무나 不足한 규정이다. 衣服을 차려입는 것을 服裝이라고 하겠지만 服裝은 一種의 自己表現이다.
따라서 그 옷차림을 보아서 그 사람의 됨됨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衣服은 사람을 만든다』라는 俗談은 이 事實의 逆表現이겠다. 그리고 時期와 環境과 身分에 어울리는 服裝姿勢를 勸奬하는 敎訓이기도 하다. 봄은 女人들의 옷차림에서부터 찾아온다는 말이 있듯이 화창한 봄철에 연한색갈의 가벼운 의상은 그 時期에 적절하고 보는 사람의 마음을 그만큼 온화하게 그리고 기분좋게 해준다. 그러한 의상의 主人公 역시 한결 마음 가벼울 것이며 의상의 效果는 바로 여기에 있을게다. 世上에는 예로부터 男女의 服裝이 有別하듯이 身分을 따른 옷차림이 어느정도 區別된다는 것은 한 通念으로 되어있다. 그 衣服을 입으니까 꼭 깡패와 같다. 혹은 XX와 같다. 하는 것은 옷차림과 身分의 關聯性을 말하는 것이리라.
如何間 衣服의 身分性을 無視하면서 살 수는 없는가 보다. 이점을 무시하고 어떤 服裝을 했을때에 그는 배우가 되고 人形이 되고 XX이 되곤 한다.
社會는 前보다 더 많은 相互交隊를 要求하게 되었다. 서로의 接觸交易은 生存競爭의 重要한 尺度가 된 이 마당에 服裝문제쯤은 직업상의 外交官에게뿐만이 아니라 일반이 지키고 있는 重要한 에티켓 中 하나가 되었고, 衣服을 시기와 환경과 신분에 알맞게 입어야 한다는 것은 常禮으로 되어있다. 世上에 있는 敎會는 異邦人的 存在나 外部에서 侵入해 오는 植民地化的 세력이 아니다. 敎會는 世上과 通하는 말을 해야하며 世上과 接觸함으로써 맡은바 福音을 世上에 전달하는 使命을 가지고 있다. 敎會의 世俗化는 이와같이 함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이 또한 敎會의 社會參與란 말로 表現되기도 한다. 교회를 지도하는 神父들은 世上과 통하고 접촉해야 할 위치에 놓여있다. 一定한 계급이나 어떤 特定人이 아니라 社會一般과 교제하는 말하자면 外交官이다.
그런데 이러한 入場에 있는 神父드에게만 유독 眼裝의 時期性과 身分性과 환경적 당성이 缺如되어야 할 理由는 무엇이냐? 구태여 그들만의 禮式때나 旅行때나 會合때나 散策때나 區別없는 服裝을 갖추어야 할 理由는 무엇이냐? 간혹 服裝의 環境適應性을 제나름대로 찾아입는 그들이 왜 비난과 빈축을 사야하는가?
李慶雨(경북 신동본당 주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