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6월 24일부로 「모든 교회의 관심」이라는 「자발령」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2부로 나누어져 있고 제1부에서는 간단히 서문적인 것으로 「로마」 교황의 여러가지 사명과 자기의 사명 수행을 위한 기구에 대한 서술이었고 또한 교황의 실제 활동을 열거하면서 교황의 전세계교회에 대한 관심을 잘 나타내었으며 교황의 사절을 파견하는 근본적 의의를 해설했다. 그리고 제2부는 12개조로 된 실천적 지침으로서 교황이 파견하는 사절의 범주와 정의(1-2) 사절직무기간(3) 제1차 적 목적(4) 평상업무(5) 각 주교와 주교회의와의 관계 및 주교의 임명과 새 교구 창설에 대한 임무(6-8) 수도단체와의 관계(9) 파견된 정부와의 관계(10) 국제기구와의 관계(11) 사절의 특권(12) 등을 내용으로 하고있다. 이는 제2차 율령 「주 그리스도」 제9항에 명시된대로 주교들의 사목활동을 위해 교황사절의 직무한계를 명시해 줄 것을 요청한데 대한 교황의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자발령의 내용면으로 보아 전통적인 교황사절 직무에 대해 아무런 새로운 것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이 문제를 이번처럼 명문화해서 발표한 일은 일찍 없었다 하겠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요 그다지 필요치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든다. 오히려 기대에 어긋나는 나아가서는 평지에 풍파를 일으키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선동적인 외신들은 억압에 대해 반발하는 모든 세력을 교황이 꺾고자 하는데 그 저의가 있는 것처럼 보도하고 있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폭력과 강압으로 이룩된 돤체가 아니며 어디까지나 형제적 사랑으로 융합된 하나인 그리스도의 신비체임을 아는 우리에게 근본적인 면에서 아 무런 의의도 없다. 우리의 참된 관심사는 자발령을 반포한 교황 성하의 참뜻을 얼마만큼 잘 이해하고 실제로 그 뜻이 잘 이룩될 수 있겠는가 하는데 있다. 교황의 뜻이란 두말할 나위 없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생명을 버리고 모든 이를 위해 성부께 기도하며 한사람도 빠짐없이 어버이로서 보살피고자 하는 그 뜻과 꼭같다. 그러기에 교황의 모든 이에게 대한 관심은 지극히 당연하고 항상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우리와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고자 하는 그뜻을 감사로히 받들어야겠다. 교회는 완전한 단체이면서 또한 완전하지 못하다. 바로 여기에 교황의 고민과 우리의 고민이 있다. 교회의 신적 요소는 완전무결하지만 인간적 요소는 지극히 불완전하다 하겠다.
그리스도의 지상대리자이요 최고 목자인 교황 자신도 시공의 제한을 받고 또한 불안전한 인간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교황께서는 불완전한 인간적 기구와 인적 요소를 통해 그리스도의 유업을 계승하지 않을 수 없다.
교황이 각국에 사절을 파견하는 근본 이유는 이것 이외에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그러기에 교황께서는 이번 자발령에서 명백히 교황사절이 주교직권을 대행케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고 어디까지나 봉사하고 형제애로 협조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런 뜻에서 교황의 사절은 교황의 자부적 배려의 소산으로 환영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관찰은 정반대임을 부인 못한다. 교황사절은 마치 구세대의 왕의 칙사로 오인되고 교황의 자부적 사랑을 흐리게 하며 나아가서는 교회내의 불만의 대상이 된 것도 사실이다. 교황사절 직무이행에 의혹과 불만은 있었고 지금도 있다. 이는 공의회의 전술한 율령이 잘 뒷받침해 준다. 그러기에 이번 자발령 제2부 세부지침 제6~9조까지 예컨데 주교회의 관여 · 간섭, 의안의 사전 통고 및 교황청 제출 보고서의 사절의 사전검토 지시에 많은 잡음이 있다. 또 나아가서는 이런 관여, 간섭이 발전도상 국가에 더욱 필요하다고 한 것은 필요이상의 보수적 「빠떼르날리즘」의 소치로 오해되기 쉽다. 교황사절은 이질적 존재로 한민족감정이 동화되기는 그리 쉬운 것이 아니며 만약 실정을 잘 파악치 못하고 근시안적이며 주관적 간섭으로 각 교구 사목행정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역사적 비극을 초래할 수 있음을 경시할 수는 없다. 또한 교황사절의 파견은 기구상으로 보아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것으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류」를 저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우의 불만도 있을 수 있겠다. 모든 신자는 모든 교회가 진정한 의미에서 교황과의 유대를 피부로써 느기고 싶어한다. 그리고 참된 어버이에게 대한 존경에 조금도 인색하지 않다. 어떤 제도나 기구가 이를 저해한다면 마땅히 우리의 혐오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정될 수 있고 시정되어야 한느 기구나 제도의 운영을 관심을 갖고 관찰해야 할 필요도 있지만 항상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교황의 참뜻을 이해하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