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니면 「남」』이란 말은 우리先祖들이 交際人生에서 失敗의 고배를 몇번이고 마시고 한말인줄 안다. 그래도 이런 格言을 무시하고 人生은 他와 더불어 사는 것이니 어찌 不信하는 處世를 하랴싶어 이웃을 믿고 살아보려 하지만 마침내는 우리 역시 人生살이 眞理처럼 이런 말을 토로하게 된다. 믿고 살수 없는 세상 『나아니면 남』이야 하고.
나의 存在와 他의 存在가 서로 獨立된 存在인줄 누가 모르랴! 그런 의미에서 他의 의식을 새삼 가지는 것은 아닐 줄 안다. 남을 나와 같이 생각했던 마음의 포기로서 「남」이라는 것이고 「너와 나」를 두번다시 잇지 않겠다는 決斷으로서 「남」이 아닌가 싶다. 父母子女 夫婦 親知 이웃社會사이에 모두를 못믿을 남으로 돌려놓고 사는 길밖에 없다는 이를 악문 고립의 決斷이기도 하리라. 쓰디쓴 人生 孤獨한 人生 원망과 저주가 가득찬 人生의 體驗이 여기 깃든다.
그래도 東洋의 聖賢은 『己所不欲勿施與人』하고 『내 싫어하는 바를 남에게 씌우지 말지니라』하고 가르쳤고 이것 또한 人生眞理로서 숭고하게 받들어왔다.
허나 오늘의 世態는 어찌된 셈인지 나아니면 남이라는 人生觀으로 굳어져가는 것 같다. 토마스 홉스의 말대로 『사람은 서로가 시랑이』가 되어가는 상 싶다. 경제성장을 위해서 서로 시랑이가 되어야하는 것일까? 요지음 平和共存이란 말을 쓰고 있다. 미국과 소련이 무서운 核무기를 쌓아놓고 으르렁대면서도 너 죽고 나 죽지 않기 위해서 내세운 平和共存인줄 안다. 그것은 人生哲學이나 倫理原則에서 나온 平和共存이 아니다. 서로 죽지 않기 위해서 서로 害하지 말자는 것이다. 서로 싸우고 害하고 등치고 살아야 잘살지 못한다는 아니 서로 손을 잡아야 살수 있다는 結論을 實證的으로 얻었고 結果的으로는 억지라도 남을 害하지말라는 윤리를(사람된 도리를) 지키겠끔된 셈이다.
이런 세상인데도 우리는 最少限 平和共存의 현명도 못찾고 사는 상 싶다 맥주병에 물을 타는 경제성장 서로 믿고 부어오던 산통을 깨는 背信 이러고도 잘사는 조국이 된다고 믿어야 한단 말인가?
시랑이 붐바퀴에 낀 羊이 연상된다. 거친 세상에도 良心을 지키고 착히 살아보려는 사람들 말이다. 착한 사람들이 살기에 너무나 힘든 세상인상 싶다. 良心과 信賴와 不信 正義와 不正의 갈래길에서 예수님의 가르쳐 주신 眞理를 따르려는 純直한 그리스도人들의 生活은 얼마나 괴롭고 힘든 것일까.
그래도 善意에찬 사람들은 『義德을 목말라하는 이는 眞福者로다. 天國이 그들의 것이니라』하신 예수님 말씀에 용기를 얻을 줄 믿는다.
바른쪽 뺨을 얻어맞으면 왼쪽 뺨 마저 내놓을 자세를 다짐해보기도 하리라. 거기에 남을 내 품에 안고 남을 나같이 생각해보려는 아량이 생기고 『己所不欲勿施與人』을 넘어서 남을 내 몸같이 사랑해 보려는데까지 마음이 미칠줄 안다.
待臨節이 시작되고 얼마안가 크리스마스다.
『나 아니 면 남』이라는 心情으로서는 聖탄의 기쁨이 있을 수 없다. 남을 나와 같이 사랑해 보려는 마음이 준비되어 있는 이에게만 성탄의 기쁨을 나눌 수 있다. 우리주변에 불쌍한 우리의 형제자매를 잊고서 성탄이 기쁠 수 없다. 옥중에 병원에 고아원 양로원에 일선의 국군사병들 그리고 사회 구석구석에 있는 불우한 우리형제자매는 남이 아님을 기억해야겠다.
李鍾興 신부(대구대교구 상서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