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河가 흐르고 이쪽과 저쪽의 在來가 가로 막혔을 때 不便과 답답함은 어느 한쪽만이 아니고 피차가 마찬가지다. 決裂, 分裂의 問題意識에서 解決策으로 가교를 두게 된다. 技術과 財力에 따라 完全하고 長久한 가교가 可能해진다. 적은 비에 떠내려가고 큰 장마에 없어지고 마는 가교는 아무도 원치 않는다.
人間交際生活에도 江河로 가로막히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고 個人사이에 있어서나 集團사이에나 이 關係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人間은 마음의 가교를 두는 方法으로 여러 가지의 外交手段을 쓴다. 즉 交際와 外交다. 그러나 이것들은 外的 形態를 두고 하는 말이다. 重要한 것은 마음의 가교이고 「사랑의 다리」라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交際와 外交가 利害關係로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現實이기에 하는 말이다.
世上살다보면 絕交를 決心했다가 다시 和解로 向하는 것이 常情이지만 善意의 사람일수록 和解의 時間이 단축된다. 그러나 이 善意도 캐고 보면 『남하고 담을 쌓고 사는 것이 여러모로 損害이니』 식의 동기가 고작이다. 역시 現實的이고 利害心의 限界를 넘지 못한다.
이 現實的인 利害心을 떠난 精神的인 가는 그 만큼 現實을 초월한 信仰的 人間일때 비로소 可能하다. 他를 나와 같이 사랑하기 위해서는 利害를 초월하지 않고는 不可能하다. 이러한 精神的 支柱가 없고 보면 때로는 絕交가 和解보다 價値있다고 생각하게도 된다. 實利만을 추구하고 思考와 性格이 相合안되는 人間과의 交際는 百實無益하다고 斷定지우니 말이다.
在歐時 修女님들이 경영하는 養老院指導神父로 있을 때 이런 할머니를 본 記憶이 난다. 90세 高령으로 養老院의 몸이 되어 성탄날이 되었다. 즐거운 성탄이건만 이 할머니는 즐거워하기는 커녕 온終日 窓가에 앉아 눈물로 지내다가 내방을 찾아와 통곡까지 터뜨리기에 사연을 물으니 初年과부로 고생고생 키운 아들兄弟가 80里 밖에 살고 있건만 30年동안 얼굴한번 못보고 살아왔고 헤어졌던 家族이 모이는 聖誕節이건만 이날이 되니 더욱 슬픈 마음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그리되었느냐 물으니 사나운 며느리가 생기고서 그 모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 역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義憤이 치솟기도 했었다. 그리스도敎的 文化傳統이 있는 西歐땅에 모진 人間은 아니 그리스도敎를 모르는 東洋人보다 더 모진 人間이 있을 수 있구나 하는 새體驗을 한 것이다.
聖誕이 가까와 오니 지난일이 새삼스리 떠오른다. 30年동안 이웃에 살며 父母를 버린 子息이 우리周邊엔 없겠지만 크고 작고 간에 絶交아니면 마음의 담벽을 쌓고 이 聖誕이 해를 넘기려는 사람은 있을 것만 같다.
성탄 「카드」를 띄우고 선물을 마음껏 하려는 聖誕佳節은 마음의 架橋, 사랑의 架橋에서 맞아져야만 聖誕다운 기쁨을 나눌 수 있다. 聖誕은 미움에서 解放되는 날이요, 人類의 絕交가 和解로 돌아서는 날이기에 기쁘고 그 기쁨을 나누기위해 또 表現하기 위해 「카드」를 띄우고 정성어린 선물이 오고가는 것이다. 마음이 갈라지고 깨진 사랑자리에 다리를 얹어놓고 聖誕을 맞이했으면.
李鍾興 신부(대구대교구 상서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