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적인 얘기지만, 일찌기 토인비는 『인간의 정신적 發展은 물질적으로 너무 가난해도 안되고 너무 부유해도 안된다』고 설파했다. 지나친 富가 해이를 초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萎縮과 坐초로 허덕이게 하는 극도의 缼乏역시 발전할 수 있는 정신적 餘白을 남겨주지 않는다는 얘기다. ▲경제개발에의 執念이 과거 어느 때보다 强力히 대두됐던 60년대는 의존과 설움의 歷史를 더 이상 연장하지 않으려는 민족적 覺醒의 일환이란 점에서 높이 評價된다. 1차 계획기간 중의 年평균 8·3% 2차 3년간의 年率 12·1%라는 성장數値는 그동안의 한국경제가 얼마나 高度성장일변도의 街路를 치달아 왔는가를 명백히 입증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면상의 그 높은 成長率은 극복해야 할 너무나도 많은 問題들을 도처에서 露出시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성장에만 급했던 나머지, 무계획하게 外資를 大量流入함으로써 高投資의 추세는 국제收支구조의 畸形化와 공업외 다른 산업·地域·企業간의 격차를 유발했으니 말이다. 財政의 시녀로 추락해버린 금융·정부主帝정책으로 인한 국민稅부담의 증가 등등으로 富益富 貧益貧의 斷層이 날로 深化되고 있는 實情이다. ▲그런데 그런 문제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重大한 문제가 또 하나 있다. 잘살아보겠다고 악을 쓰면서도 그런 사람들일수록 정말로 잘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선 거의 무관심하다는 점이다.物質에의 過度한 狂信이 빚어내는 人間喪失의 悲劇, 그것이야말로 本性을 잃고 外形만을 취한 「도금한 모세의 피리」 같은 비극이 아니고 무엇인가. 모세가 羊을 부를 때 쓰던 참대피리를 훗사람들이 초라하다고 金皮를 올린 후부터 그 피리는 영영 본유의 소리를 잃었다는 것이다. ▲아뭏든, 수다한 문제를 떠안고 있는 70년대엔 적어도 개발정책상의 試行착오를 더 이상 방치해선 안되겠다. 동시에 번지르한 겉치레만으로 무의식중에 인간을 商品化시키는 건조한 풍습을 배제해야 겠다. 무엇보다 人間회복에 순수한 감각과 意味의 회복에 우선적인 관심을 쏟아야만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