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괜히 어려운 말을 써가지고 교우에게 쓸데없는 짐을 지울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고. 어려운 말로 송경(誦經)해야만 공덕(功德) 쌓음이 된다는 법이야 있겠는가.
⑮「옛공과」 에 나오는 『아니려』를 『아니하려』 혹은 『않으려』로 고쳐놓았다 하여 주 신부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는데 정말 컴컴한 해동소국(海東小國)에는 별의별 일이 많구나! 보라 『아니』는 부사(副詞)요 『……려』는 의지 표시의 어미(語尾)가 아닌가. 동사나 형용사의 어간(語幹)에는 어미를 달아 활용할 수 있지마는 글쎄 부사에야 무슨 수로 어미를 달아낸단 말인가. 부사에 어미를 달아갖고서야 어떻게 개념을 표현해낸단 말인가. 포도(葡萄)나무에 철사를 접지(接枝)해내는 파천황적(破天荒的) 솜씨가 아니고서는 부사에 어미를 달아 개념을 표현해내지는 못할 것이다. 하니까 『아니려』는 도까비세계에서나 통할 수 있는 말이지 지성을 지닌 인간의 세계에서는 도저히 통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므로 『아니하다』라는 원형에 의지표시의 어미 『……려』를 붙이어 『아니하려』라 해야 된다.
또 『아니하다』가 줄면 『않다』가 된다. 줄여쓰려 할 때엔 모음들을 줄임이 통측(通則)이니까. 일단 줄여진 뒤부터는 『않다』는 제법 원형직능(原形職能)을 갖게 된다. 그런즉 원형 『않다』의 어간 『않』에 보조모음 『으』를 붙이고 그 『으』 밑에 의지표시의 어미 『……려』를 달아 『않으려』로 만들어 쓰는 법이다.
⑯ 『부르지지나이다』를 『부르짖나이다』로 고쳤다 하여 마치 사문난적(斯文亂賊)의 선고를 내린듯한데 그도 어간과 어미변화의 경위를 통 모르니까 그런 터무니없는 꾸지람을 퍼부을 법도 하다. 보라 『꾸짖다』가 원측인데 이를 분석하면 『꾸짖』은 어간 『……다』는 어미다. 이 어미부(語尾部)는 경우경우를 따라 변화한다. 이런 초보어법도 터득(攄得)치 못한 이로서야 어찌 『새공과』를 왈가왈부할 수 있겠는가. 이런 자의용훼(恣意容喙)는 학문의 세계에는 용납되지 않으니 삼가야 한다.
⑰『가벼우리라』를 『가벼우리라』로 고쳐놓았다 하여 꾸짖었것다. 그는 변측용언(變則用言)의 이법(理法)을 모르고 하는 꾸짖음이다. 중언복언(重言複언)이 되지마는 그는 어간의 골 『ㅂ』이 모음 위에서는 『우』나 『오』로 변하게 되는 발음현상을 모르고 하는 비난이다. 이 ㅂ소리가 변하게 된느 말들을 ㅂ 변측용언이라 이른다. 하니까 원형 『가볍다』의 활용형은 『가벼우니』 『벼워라』 『가벼우리라』……로 되는 법이다.
⑱『우리들로 하여금』을 『우리로 하여금』으로 『우리등이』를 『우리가』로 『우리들의』를 『우리의』로 『우리들에게』를 『우리에게』로 『우리들은』과 『우리등은』은 『우리는』으로 『너희들의』을 『너희의』로 『우리등과…… 우리등의』로 고쳐놓았더니, 이는 신성한 『옛공과』를 모독한 거싱라고 호통을 하것다. 자 그렇다면 말이지 「라틴」말이나 영 · 독 · 불 말은 깨끗이 써야 하고 국어는 풍타우하랑타식(風打雨下浪打式)으로 쓰여도 괜찮단 말인가. 모라! 『우리』는 완전한 제一인칭복수형(第一人稱複數形)이요 『너희』는 완전한 제二인칭복수형이요 『저희』는 완전한 제三인칭 복수형이어늘 여기에다가 복수형표시의 『들』은 왜 붙이느냔 말이다.
그게 바로 화사첨족(畵蛇添足)이 아니겠는가. 워낙 글이란 더우기 엄숙한 글이란 그저 머리에 떠오르는대로 입에서 나오는대로 아무 검토도 없이 마구 쓰면 안된다.
⑲『얼마 사람』을 『많은 사람』이라고 고처놓았더니 왜 고쳤느냐고 노하것다. 허나 보라 『얼마』란 말은 명사이니까 말이 되게 하자면 『얼맛 사람』 혹은 『얼마 되는 사람』이라고 써놓았다면 그는 괜찮다 하겠지마는 그저 『얼마 사람』이라고 써놓았으니 그는 되잖은 말이다. 그래서 『많은사람』이라 고쳐놓았다. 이 『많은 사람』이란 말이 비위에 거스리거든 차라리 『얼맛 사람』 혹은 『얼마 되는 사람』이라고 써넣어야 한다. 『얼맛 사람』이란 말은 곧 『얼마의 사람』이란 말이니까.
⑳『불과 자기 젓으로 자식을 기를 뿐이로되』를 왜 『다만 자기 젖으로 자식을 기를 뿐이로되』로 고쳤느냐고 야단을 냈지마는 「옛공과」의 그 문장은 서투른 문장이다. 『불과』란 한자어를 버리기가 아까우면 차라리 『자기 젖으로 자식을 기름에 불과하되』라 해야 된다. 허나 이런 문장에 조차 즉 순수한 국어로써도 넉넉히 그 개념을 표현할 수 있는 문장에 조차 다는 알아듣지 못하는 한자어를 써야할 필요야 있겠느냔 말이다.
㉑『영하는 못하오나』를 『여하진 못하오나』로 고쳤다 하여 말썽을 부렸다. 그도 역시 영남사투리가 아니면 고어형이다. 옛글의 『아디몯하다』이다.
㉒『가득게』란 어형은 되잖은 어형이다. 으례 『가득케』라고 고쳐야 한다. 줄이지 말고 말하자면 『가득하게』라고 해야 옳겠지마는 흔히 줄여서 말해도 괜찮으니까, 줄여 쓰려거든 『가득하게』의 ㅎ소리와 ㄱ소리를 합쳐서 『가득케』라 써야 옳다. 이런 지극 간단한 발음이 법도 모르고 괜히 성만 내니 딱도 하이.
㉓『생각건대』란 어형에 대한 비판도 전조의 그것을 준용(準用)하여 하면 된다. 제대로 말하려면 『생각하건대』라고 해야 한다. 허나 줄여쓰려면 『……하건대』의 ㅎ소리와 ㄱ소리를 합쳐서 『생각컨대』라고 써야 한다.
徐昌濟(가톨릭의과대학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