㉔「공과」의 영성체 후송에 나오는 『나를 두루혀』는 『나를 돌이켜』라고 고쳐놓아야 현세대의 영혼을 사로잡을 수 있다. 나도 영성체를 하고나서는 의례이 경문을 외곤한다. 나의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던 「프로테스탄티즘」을 분쇄하고는 내 영혼을 철저히 「가톨리씨즘」으로 돌이켜 놓은 경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경문을 즐겨 왼다. 그런데 저 월인석보상절서문(月印釋譜詳節序文)에 나오는 『두루혀」로 외워서는 도무지 심정에 통철(通徹)되지를 않는다. 어떤 선입관을 버리고 냉정히 오늘날 우리 언어사회의 현실을 살펴보라. 『두루혀』란 말을 누구가 능히 알아듣는가를…. 그 말뜻을 『모르는 이가 어찌 네 감사의 기구에 아멘이라 응하리요』(코린도전서 一四장 十六절)
㉕『죽기에 이르히』를 『죽기에 이르도록』이라 고쳤다하여 노발대발하겠다. 보라, 이 『이르히』가 바로 일본어직역어형(日本語直譯語形)『여(如)히』 『필(必)히』 『조(早)히』와 동근이주(同根異株)의 되잖은 말이다. 한문위세(漢文威勢)에 또는 일본어세력(日本語勢力)에 눌려 병신된 어형이기 때문이다. 아무 말에든지 『……히』를 달아놓기만 하면 부사(副詞)가 되는 줄 알고 있으니 아 콧구멍 들 내기가 다행이구나!
또 『이르히』란 어형은 고어휘(古語彙)에도 없으니 어쩌잔 말인가. 남들이야 알아듣든 말든 자기자신의 주관적 어감에만 맞으면 아무 고려(顧慮)도 없이 막 쓰려드니 이를 애덕결여(愛德缺如)의 소행이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또 이 『이르히』를 천국의 용어로 알아서인지, 이 신성(?)한 이형에 외람히 손을 댔다하여 『이처럼 아름다운 옷에 웬 똥칠은 이다지도 심할까』하는 준절엄절(峻切嚴切) 논죄문(論罪文)으로써 기어이 독성죄인(瀆聖罪人)으로 몰려드니 기막힌 노릇이다.
㉖『천주에는』을 괜히『천주에게는』이라 고쳤다하여 나무랐다. 위에서도 지적했거니와 『……에』는 처소(處所)에 『……에게』는 사람에게 쓰이는 어미이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을 갖고 예를 삼아 말할테니 들어보라-- 『성당에 가서 신부님에게 여쭈었다』 『제대 앞에 이르러 감실(監室) 안에 계신 오주·예수에게 조배(朝拜)했다』해이 말이 되잖는가. 천주에는』이란 말은 일본어직역어형인줄 알아다오, 제발.
㉗『아넣는다』는 옳고 그 어형을 고쳐놓은 『않는다』는 틀렸다 했것다. 대체 『아넣는다』란 말이 어디 있는가. 이런 되잖은 말을 왜 자꾸 고집하는가 말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마는 『아니하다』를 주려서 『않다』로 쓰게 되었으니까 인제 『않다」는 뚜렷한 원형직능(原形職能)을 지닌 말이다. 그는 그 『않』는 제법 어간으로서 여러 어미를 거느리게 된 경위를 다시금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않다』의 진행현재형이 바로 『않는다』인줄 알아야 한다.
㉘『맛을 싫이어하고』라 고쳐놓았다 하여 말썽을 부리지마는 글쎄 『싫이어하고』란 국어어휘가 있단 말은 가문(嘉聞)인 탓인지 들은 바 없다. 고어휘에도 그따윗 말은 없다. 고어에나 현대어에도 그와 비슷한 어형이라도 있어야 되나 안되나 쓸 수도 있잖겠는가. 다만 삼강행실도제해(三綱行實圖題解)에 『슬ᄒᆞ다』(不肯)란 어형을 보인다. 그런즉슨 순교선렬들은 이 『슬ᄒᆞ다』를 가지고 자의(恣意)로 또는 되는대로 그 활용형 『싫이어……』를 만들어 내었음인가.
㉙『각가지 장착』을 『각가지 망측』이라 고쳤다하여 심지어 한불자전(韓佛字典)조차 원용(援用)해가면서 호되게 꾸짖었으니 말이지, 대체 한불자전설명대로의 『망착』은 『망측』이란 말과 일맥상통(一脈相通)되는 말이 아니란 말인가. 다 아는바 『망측』(罔測)이란 말은 『도리에 너무나 어그러저서 그 역리(逆理) 정도를 측량해 낼 수 없다』는 의미의 말이 아닌가. 또 『망착』(妄着)이란 말을 굳이 옹호(擁護)하려드니 말이지 원래 망착이란 말은 국어에도 중국어에도 없는데야 어쩔텐가. 하기는 망작(妄作)이란 말은 있을 수 있다. 특재망작(特才妄作)이란 말이 있으니까. 또 중국어에도 망작(妄作=Wang-tsuo)란 말이 있으니까.
㉚『가음연 곳집』을 『풍부(혹은 부요)한 곳집』이라 고쳤음을 비난했으니 말이지 글쎄 『가음연』이란 말이 신주삼천리(神州三千里) 어느 구석에서 쓰인단 말인가.
<최세진>훈몽자회(崔世珍訓蒙字會)에는 부자(富字)밑에 그 훈(訓)과 음(音)을 달되 『가△, 멸(부)』했고, 두시언해(杜詩諺解)에도 부귀(富貴)란 말을 국역(國譯)하되 『가△, 멸다귀흠……』이라 했다. 그런즉 그 구수하다는 고이로 경본을 엮으려 할 진대 으례 원형 『가△,멸다』의 활용형(活用形) 『가△, 멸은』을 가지고 『가△, 멸은 곳집』이라 해야 된다.
그렇기는 하나 오늘날 누가 『가△, 멸다』란 말을 알아듣겠느냘 말이다. 그러니까 원형 『풍부하다』 혹은 『부요하다』의 활용형 『풍부한』 혹은 『부요한』을 가지고 『풍부한 곳집』 혹은 『풍부한 곳집』이라 함이 옳다는 말이다. 한자어를 쓰기 싫어든 원형 『가멸다』(富)의 어간 『가멸』에 어미『은』을 달아 『가멸은 곳집』이라 해야 된다.
徐昌濟(가톨릭의과대학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