㉛『서럽다』『설다』란 현대어가 있다. 이 두말은 『섧다』의 변형어(變形諸)라 또 『섧다』는 변칙용언(變則用言)이니까 「섧다』를 가지고 명사로 만들 고저하면 『설움』이라 함이 옳다. 따라서 『서러움』은 틀렸다.
함경도 정평이남 전역(咸鏡道 定不以南 全域)에는 「서럽다』나 『실다』가 통용되고, 정평이북 두만강안(豆滿江岸)에 이르는 삭북지역(朔北地域)에서는 『섧다』가 통용된다. 삭북지역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고이를 많이 쓰고 있는데, 그는 아마 수백년래 귀양간 인사들의 자손이 눌러살고 있기 때문이겠다. 그렇다하여 『섧다』가 고어란 말은 아니다. 다만 『서럽다』나 『설다』보다 나이 많은 말이니까 하는 말이다.
『설움』을 『서러움』이라 고쳐놓은 까닭은 대다수의 겨레가 『서럽다』를 쓰기 때문에, 『서럽다』는 벼칙용언이기 때문에 이다. 하니까 『서럽움』이라 고쳤다 했자 큰 과오는 아닐 듯하다. 이쨌든 『설움』이 표준말이니까 선입주(先入主)를 버리고 으레 그를 써야 마땅하고, 『서러움』 을랑은 버려야 한다.
㉜『내게 떠남을』은 아예 되잖은 말이다. 『나를 향(向)하여 돌아온다』라든지 『나을 향하여 가까이 온다」라든지 하는 말을 『내게 돌아 온다』『내게 가까이 온다』라고 하잖는가. 그런 즉 『내게 떠남을』 이란 이런 우스운 말이 어디 있겠는가. 『나를 버리고 떠남을』이란 말은 으례 『내게서 떠남을』이라 해야 되잖는가.
『내게 떠남을』이란 말은 마치 손으로는 만류(挽留)하는체하면서 발길로는 차서 내쫓는 꼬락서니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나 할까.
㉝『우리 안에 양』이란 말도 우스운 말이다. 아니! 되잖은 말이다. 『우리 안에 양(羊)이 들어간다』라는 말은 말이 된다. 공과에 쓰인 그 말은 『우리 안에 들어와 살 자격을 갖추고 있는 양』이란 만일 텐데, 그렇다면 으례 『우리 안엣 양』이라 해야 말이 된다. 왜 그런고 하니 국어에 있어서는 제二격 『의』를 간단히 『사잇 ㅅ』으로 처리해 쓰는 관례가 퍽도 많기 때문에 이다.
『나라의 돈』을 『나랏 돈』이라, 『나라의 글』을 『나랏 글』이라, 『학교의 책』을 『학굣 책』이라고도 하잖는가.
그런 즉 문제의 『우리 안에 양』은 『우리 안에의 양』이란 말인데, 이 제二격 『의』 『사잇 ㅅ』으로 처리해 놓으면 『우리 안엣 양』이 되는 법이다.
㉞『…할바 영원히』를 『…할바 영원히』라 바꾸어 놓았다 하여 또 말썽을 부렸는데, 그도 국어의 간단한 어법조차 모르기 때문에 이르킨 말썽이다. 국어에는 『하다』를 붙여서 만든 말이 꽤 많은데, 그런 종류의 말들을 가지고 부사를 만들려면 그 어간에 『히』를 달아놓는 법이다. 그러므로 『넉넉하다』의 부사는 『넉넉히』요 『똑똑하다』의 부사는 『똑똑히』요 『무던하다』의 부사는 『무던히』이다. 물론 몇 마딧 예외도 있기는 있지나는. 자 그런 즉 『영원(永遠)하다』의 부사는 『영원히』임이 뻔하지 않는가.
㉟『찌어지다』를 『찢어지다』로 바꿔놓았다 하여 꾸짖었는데, 실상 알고 보면 고어에는 『ㅂ즞다』 열(裂)이란 어형이 나온다. 불전금강경언해(佛典金剛經諺解)에 나오는 어형이다. 그런 즉 『찢어지다』는 고금통용이니까 얼마나 좋은가.
두시(杜詩)의 안득춘이보지열(安得春泥甫地裂)을 언해(諺解)한 이가 『…ㅂ즤ᄃᆞㅣ를 기우려노』라고 해놓았는데, 「옛공과」의 「찌여지다』는 아마 이 『뵈여딘』의 변형 『뵈여디다』의 변형인 듯하다. 그렇다 치더라도 대체 오늘날 『뵈여디다』 혹은 『짜요자더』란 말을 누가 알아듣는단 말인가.
㊱「옛공과」에 『슬겁고』라는 어형이 나오는데, 글쎄 『슬겁다』라는 원형이 있을쎄 말이지, 그런 원형이 없는 데야 어찌 『슬겁고』란 활용형이 나올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슬기롭고』란 원형이 있으니까 말이다. 원형이며 그 활용형의 경위를 분간치 못하고 함부로 시비를 거니 딱한 노릇이다.
徐昌濟(가톨릭의과대학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