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告) 베두루 김명제(金命濟) 신부님의 참혹한 마지막 길을 되씹어보기에도 민망스럽고 송구스럽다.
▲지금 최고령 주교이신 대전 <라리보> 원 주교님은 『고집통이 아! 그 金고집이 죽었다고』하시면서 그를 가장 잘 알고 있는 한분의 주교요, 벗으로서 대략 다음 같은 회상담을 들려주신다.
▲<베드루> 김 신부님은 순교성지(殉敎聖趾)로 이름 높은 충남 「내포」 「서산서거리」에서 출생 그때 합덕본당 초대주임 <레오>남 신부(一八九九~一九○四)의 천거로 신학교에 입학 빛나는 제一회 졸업생으로 서품되셨으며 一九○八년 만주 북간도(北間道)로 건너가 그 당시 민(閔뮤뗄) 대주교 슬하에 <라리보>(현大田元主敎) 신부님과 같이 한국사람 가운데서 성무를 보셨다. 그곳의 교우수는 천팔백명이나 되었고
▲그 후 전라도에서 근 十년간 다시 황해도로 전출 三十년간을 황해도 땅에서 저내셨으니 그곳 구교우들 치고 김 신부를 대면치 못한 분이 없을 것이다. 김 신부님의 목표는 어떻든 방인교구가 하루바삐 이루어져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一九二八년 이곳에 감목대리교구가 설정됨과 동시에 초대 감목으로 임명되었다.
▲三·一운동의 불길은 휘몰아쳐 지났으나 김 신부님의 가슴 속에 또다시 타오르는 불길 그것은 동포의 교육이었다. 그때(日製)가 어느 때라고 그러나 청년들의 교육을 위한 삼애(三愛학교 총독부 간섭으로 敬愛학교로 개칭) 학교를 훌륭히 세우고야 말았으니! 오늘 대학을 짓기가 그토록 힘들 수 있었으랴.
▲「하고야」마는 성미 「하고야」는 천하묘약(妙고약)으로 드디어 「하고약」의 애칭으로 변했다. 대전 원 주교님은 그 「하고약」을 다시는 얻을 수 없고나 하시면서 서러워하신다.
▲참으로 귀(貴)한 것을 귀한 줄 모르는 백성되어서야 될 말인가? 九十평생 그 속에 한국교회의 산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계시던 그분을 저 박물관 진열장에 있는 돌쪼각 하나만도 못하게 노쳐버리고 말았다.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우리 김 신부님 대신으로 살아계신 수(壽)하시는 어른들을 극진히 모시도록 하자. 그것이 저기서 내려다보시는 그 분의 뜻이기도 하다. (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