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년대로 이달엔 각급학교의 졸업식이 거행되고 있다. 졸업식이라는 의식(儀式)을 지내고서는 어제와는 달리 졸업생이라는 간판(看板)을 당연히 내걸게 해주고 있다.
지금 막 졸업이라는 고비를 넘기고 몸과 마음이 세단계에 들어선 졸업생들에게 구차스런 교훈을 새삼 늘어놓는다는 것은 지루할 수 있어도 어떤 의미에서도 본란을 통한 새감격이나 세분말을 더어줄 수 있으리라고 크게 기대 하는바 없다고 함이 좋을 것이겠지만, 우리 가톨릭 학생으로서 『나는 신자이다』 혹은 가톨릭 지성인(知性人)이다하는 의식(意識)이 얼마나 뚜렷한지 그 책임에 대한 자각(自覺)이 얼마나 분명한지 묻고져 하는 바이다.
우리의 현실은 학교의 문을 빠져나온 새일꾼들을 그야말로 양팔을 벌리고 맞아줄만한 수용(授容) 태세가 거의 서있지 않고 학교와 사회 간의 동떨어진 실정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학교와 사회사이에는 마치 깊은 함정이라도 파여져 있는 것 같아서 참으로 그간에 안전한 다리가 없고서는 학교졸업과 사회에로의 입문(入門)에 또 다시 허둥지둥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인 것이다.
거기엔 여러 가지 사정이 있다. 당장에 취직이라는 난관이 있다. 흔이 말하듯 하늘의 별을 따듯 어려운 노릇이다. 그 외에도 개인에게 닥치는 딱한 사정도 있을 것이다.
졸업과 취직 이 한 가지 일에서 달리 말하면 직업의 전선(戰線)에 임해서 졸업생 앞에 다친 모진 실망감은 지금까지의 모든 바탕(敎育)을 뒤흔들리게 할 수 있다.
졸업생으로서 자기의 소망대로 일할 수 없음이 진정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하루 이틀도 아니요. 그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쌓아올린 자기의 귀한 바탕에 지나친 실망감으로서 금가게 하는 일이 없도록 경고해야 할일인줄 안다.
『나는 가톨릭신자이다』하고 나서는 적극적인 태도와 『나는 신자이니까』하는 정도의 소극적인 태도는 어떤 분야에서도 지극히 필요한 의식(意識)이라고 하겠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종교의 관념(觀念)을 한갖 도덕적인 표현으로 밖에 여기지 않고 있다.
가령 그 사람은 퍽 종교적이야 하는 식으로 그의 성격이 온순하고 매사에 양순하게 꿉혀나서는 사람이면 종교적인 인물이라고 할 정도이다. 이것이 지나처서는 그야말로 투지(鬪志)가 없고 연약하기만한 어느 면으로 무기력(無氣力)한 사람을 가르켜 그 사람은 종교적이라고 한다. 남성적이기 보다는 쉽게 여성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을 보고서는 퍽 종교적인 인물이라고 하고 있으니 종교의 정의(定義)는 고시하고 도대체 무지(無知)에서 나온 것을 잡아서 논할 여지조차 없다.
그러나 그렇게 통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솔직히 시인할 수밖에 없다.
그 탓이 어디 있다고 말하겠는가. 되풀이 하거니와 우리들의 『나는 신자이다』하는 태도 『나는 신자이니까』하는 생각이 지극히 희미했던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림으로 우리 각자가 자기의 전생활분야에서 가령 의사 변호사 교사에서 비롯하여 실업가는 관리는 물론 노동직장에 있어 좀 더 뚜렷이 나는 가톨릭신자로서의 아무게 임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연고는 가톨리시즘과 우리의 생활이념理念)이 따로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가톨릭 기성인(旣成人)간에 있는 보기 흉한 일이었다면 이제 영광의 졸업생이되 새세대에선 당연히 일소되어야 할일인줄 안다.
우리는 새졸업생들에게 아무것도 떳떳이 베풀어 줄만한 입장에 서지 못하고 있음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도 그만치 새세대에 바라는 바도 큰 것이 있으니 부디 새로운 역사에의 역군이 되어달라고 하는 바이다.
새졸업생들이 만약 이런 면에서 자기를 다시 한번 살핀다면 「가톨릭신자」가 된 벅찬 감격만으로서도 자기 앞에 닥치는 소소한 일에 실망치 않을 것이며 오히려 용기백배하는 힘을 장만케 해줄 것이다.
『나는 신자이다』 그리고 『나는 신자이니까』하는 가톨릭 신자로서의 양심의 속삭임이 모든 성공의 관건(關鍵)이 될지언정 결코 실망에 무릎을 꾸는 패배자가 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그대들의 영광이요. 성우(聖佑)를 얻어가는 길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