結論
공과개편 문제란 우리나랏 성교회의 역사적 대문제요, 그 개편이 이뤄졌다면 그야말로 획기적 대성공이다. 필자는 「옛공과」의 거의 二백마디에 가까운 그릇된 말들을 비판하여 그 개편공작에 이바지하려 했으나 「가톨릭시보」의 사정으로 더 쓰지 못함을 섭섭히 생각한다.
「프로테스탄트」에서는 十우수년전 벌써 성경이며 찬송가며를 위시하여 모든 목회(牧會)상 중요문서를 죄다 깨끗한 국어문장으로 개역(改譯) 또는 개편해 놓았건만은 우리나랏 가톨릭에서는 고태의연(古態依然)한 두선문장(杜撰文堂)의 성경이며 전례서며를 그대로 습용(習用)하고 있으며 실로 찌긋찌긋한 무수고벽(묵守痼癖)이다. 사태 이렇고서야 무슨 수로 새시대를 지도한단 말인가.
또 요새 새 면모로 나온다는 가톨릭의 시 시조 산문이며 엄숙한 논문이며를 훑어보아도 반문법적 어구가 어찌도 많이 산견(散見)되는지……. 말이란 한 번 해놓으면 공기 중에 날아나 버리니까. 괜찮겠지마는, 글이란 한 번 써놓으면 천추만대 그대로 머물러 있어 흔히 문헌의 구실조차하게 되는 것이니까, 적어도 오교(五校)는 해야 하겠거늘 우리나랏 가톨릭에서는 기껏해야 이교(二校) 정도로 세상에 내보내는 듯하니 한심한 노릇이다.
선조조문호(宣祖朝文豪) 최간이(崔簡易)는 적어도 십교(十校)를 하지 않고서는 글을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 한다. 속서(俗書) 간행에도 심력(心力)을 기울여야 되거든 하물며 성회의 목회문서(牧會文書)며 기도서간행에야 일러 무엇하려나. 그런데 우리나랏 가톨릭은 어쩌자고들 이럴까. 문제의 「옛공과」는 교정의 노고나 한번 겪어보았는지가 적이 의문이다. 순교선열들도 그러했었거니와 현대가톨릭의 일부인 시들도 그저 가갸거겨만 알면 국어문장쯤은 척척 쓸 수 있다고 큰소리 탕탕 치는 듯하니, 아, 더 말해 무엇하리. 그렇다면 ABC만 알면 누구든지 <쉑스피어> <밀톤> <유고>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어허! 무궁화 잎들이 손벽치며 고소할 꼴이다. <게테>의 대모국어태도(對母國語態度)를 살펴보니까 그는 그의 모국어인 독일어를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 「아리안」어계의 여러 외국어조차 연구한 듯하다. 그렇거늘 우리나랏 가톨릭은 <게테>와는 반대로 외국어를 연구하기 위하여 모국어를 동당이치는 듯도 하니 이렇고서야 어찌 조국의 빛이 될 수 있겠는가. 이렇고서야 어찌 정금미옥(精金美玉)의 국어공과 엮기에 열의를 낼 수 있겠는가.
영독불(英獨佛) 문장이며 「라띤」 문장을 쓰리 할 때엔 조심조심, 마치 옛날 용상대월(龍床對越)의 한림학사(翰林學士)가 외교문서 쓰듯 하지마는, 국어문장 씀에 있어서는 『그까지 것!』하고는 되는 데로 마구 쓰니, 이는 남의 어머니에게는 효성을 다하면서 제 어머니는 개천에 차넣는 패행(悖行)이 아닐까.
어떤 성당에서는 강복첨례 때 「라띤」 성가 부르기를 전교우에게 강요하다시피 하니, 정말 기막힌 노릇이다. 왜 그 「라띤」 성가를 아름다운 국어로 옮겨놓지를 않는고. 역시 대만이다. 불교승려들이 불도에게 덮어놓고 『수리수리 마수리 수수리 사바하』하는 법어주문(梵語呪文)만 외면 성불(成佛)한다고 우기듯이, 의미도 모르는 「라띤」 성가를 부르기만 하면 성총 지위에 오르게 된단 말일가. 만날 「라띤」말 「라띤」말 하니 말이지, 그럼 「라띤」말은 바로 <바벨>탑 붕괴 이전의 말이란 말인가.
우리의 대국어태도(對國語態度)란 이렇게 어불성설이다. 그러니까 「옛공과」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재공과」도 요 꼬락서니요, 그 밖의 가톨릭 모든 문서 중에도 국어를 무시하고 쓴 것이 적지는 않다.
대체 신성한 제대 앞에서도 신학교 강단위에서도 『다꾸안쓰께』 냄새 풍기는 말투며 「빠다」 냄새 풍기는 말투며가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판국이니, 깨끗한 국어, 바른 국어문장을 써야겠다는 태도는 좀체로 엿보이지를 않는다. 형세, 이렇고 보니 아무리 외친다해도 문제의 공과문장 개정에 성의를 기울여줄 눈치들이 보이지를 않는 듯도 하고 또 「새공과」에 대해서는 Basilisk glance로 보려드는 듯도 하니, 어째야 좋을 꼬, 한바탕 울어나 볼까. 주 신부님의 글과 필자의 졸고(拙稿)가 세상에 나온지도 벌써 여러 달이 되었지마는 서울지구 교우들은 그저 무관심일색인 듯하다. 생명의 글인 기도문제에 대하여 그 무관심이 원 이지경에야 이를 소냐. 『노래 불러도 슬퍼할 줄 모르고, 피리를 불어도 춤출 줄 모르는』 백성이로구나. 다만 신학생들만은 이 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을 품고 있다. 여기에 신학교 철학과 一학년 모군이 필자에게 보내온 글월 一편을 소개하련다.
『내년 정초를 기하여 우리 성교회는 미사성제예절과 경본과 성직자용정무경본(聖職者用聖務經本)과 교회력의 一부를 개정한다 한다. 이는 교회전례집행의 완전을 그 목적으로 하고 진보되는 한 획기적 사실이다. 그렇다면 다만 「라띤」 경본만을 그 개정의 대상으로 삼지를 맡고 우리 나랏 성교회공과도 그 대상으로 삼아주었으면 좋겠다. 말하자면 그 불충분한 점, 문법상 틀린점, 현대어가 아닌 말, 교우가 알아듣기 힘든 말들을 수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말하면 천주나 부모님에게 대하여 『너』라는 말을 쓴다든지 천주의 강복을 구한다면서 『천주는 우리에게 강복하실 지어다』하는 무엄하고도 고만불손(高慢不遜)한 명령형용어를 마구 쓴다든 지가 그것이다. 최상의 존경어를 써야할 이에게 최하의 버릇없는 말씨를 쓰다니, 원 이럴수야 있겠는가. 예비교우나 신입교우들의 귀에는 이만 저만 거스리는 말이 아니다.』(下略) 간단하기는 하나 이는 바로 새 세대 젊은 가톨릭들의 부르짖음이다. 우리나랏 젊은 가톨릭들은 이때가 바로 경본개정운동을 세게 전개할 절호의 기회인줄 깨닫고 총궐기하기를 바란다. 국내성직들이 움직여지지 않거든 교황성하에게 한국 젊은 가톨릭대회의 이름으로 상소(上疏)하라. 이는 큰일이다. 새 세대의 책무를 짊어진 젊은 가톨릭으로서 으례 해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갓 순명이란 구안(苟安)의 단잠에 맛들어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순명이 아니라 윤리태만이다.
자, 어쨌든 「옛공과」는 어느 모로 보든지 엉망이니까, 이 옛집은 헐고 새집을 반드시 지어야 한다. 수년전 급작스레 지어놓은 이른바 새집은 불완전 투성이다. 우리는 결점투성인 인간이니까 서로 부정주의(Negativism)적 눈초리로 흘겨보지를 말고 모름지기 화충협동(和衷協同)의 정신, 거단취장(去短取長)의 아량, 건설적 대국적 태도로 문제의 새집을 지어야 한다.
『얼만 좋으면 겉이야 무어……』하는 이도 꽤 많다. 그렇지마는 의식과 예전을 부정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이다. 이 역사의 전환기를 당하여 우리는 『겉 볼 안』이란 의미심장한 우리 속담의 맛을 깊이 음미하기로 하자. 주옥문장으로 엮어진 우리의 경본을 읽는 외교인 또는 열교인들로 하여금 『아, 과연 천주교는 「겉 볼 안」 이로구나』하며 탄복케 하자. 이것이 전교에 한큰 도움이 될 것이다.
徐昌濟(가톨릭의과대학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