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희망이 다만 현세 생활에만 그친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불쌍한 자들일 것이니라』(코린도 전서 一五·九) 성 바오로의 이 말씀을 부정(否定)적으로 알아듣기에는 오늘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이 말씀을 뒷받침하고 있는 듯하다. ▲누구의 말을 빌릴것도 없이 외세(外勢)에 큰 영향을 받는 사회의 뚜렷한 특징은 그 사회에 일정한 목표가 없고 또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각지에게 확고한 주견(主見)이 없는 것이다. 몇 사람이 적당해서는 몇개의 「마이크」를 장만하고 허구(虛構)한 웅변을 토하면 그대로 수많은 무리가 동원되고 거기나선 각자에게 값싼 흥분만 있을 뿐 달리 아무런 자기의견이란 분명치 않음을 본다. ▲이와 천양(天壤)의 차이(差異)를 가진 것은 우리 가톨릭신자이며 그 생활인 것이다. 가톨릭신자가 되기에는 적어도 六개월간의 준비기간을 가지고 최소한 요긴(要緊)한 교리지식을 얻는 한편 그동안 신자와 같은 생활을 익히고 비로소 자발적인 원의(願意)를 발하여 교회문을 들어서게 마련이다. 신자가된 연후에는 더욱 교회정신을 배우기에 편달하고 죽을 때까지 덕행을 닦기에 쉴사이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그러한 풍조(風潮)가 교회 안에도 들어왔음인지 간혹 개인적으로 쉬히 파괴될 것 같은 신앙의 소유자를 각처에서 해할 수 있다. 아무게는 「구제품신자」 「유학신자」 또 말하기를 「취직신자」 이렇게 빈정거리는 말로서만 간고(看做) 돼버리기에는 웃지 못할 익살을 솔직히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그리스도를 한갖 현세적 희망으로만 본 연고이라 하겠다. 바오로의 말씀대로 만일 그리스도에게 바라는 것이 그것뿐이라면 우리는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말겠다. ▲「너희들이 가면서 말하는 바는 이 무슨 사정이냐?」 (누까 二四·一七)고 물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예수 나자레노에게 대한 사정이라」(동一九) 「엠마우」의 제자들은 대답했던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많은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헛수고일 것이다. 「엠마우」로 가던 제자들의 극적인 대화에서 참으로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고 있느냐 하는 것을 깨우처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