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우리나라 국회(國會)를 중심으로 청조(請潮) 운동이 일어날 듯이 전해지고 이와 맞추어 신생활(新生活)이라는 국민운동이 벌어질 것처럼 알려지더니 그것도 점차 주춤해지고 말았다.
이와는 달리 정쟁(政爭)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해가고만 있고 국회의원들이 국민의 선량(善良)으로 솔선수범하는 의미에서 「청조운동」, 즉 각자의 사회성과 역량(力量)을 총동원하여 일편단심으로 나랏일을 해보겠다는 의기(意氣)를 무엇이 취이버렸는지, 국민 앞에 내건 「청조」는 구두선(口頭禪)으로 지금은 어째시 그런 말조차 들먹이지 못하는가? 외국인이 월수입(月收入) 八十만환이란 거액(?)을 받는 공무원이냐는 의심마저 사고 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국민의 「신생활」운동 운운 하던 것도 대낮에 본 꿈처럼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청조」는 「신생활」운동하는데서 비록 거기서 당장의 큰 성과를 걷을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로인해 얻어질 정신적 효과를 크게 주목하고 있었다. 어느 번영하는 국민의 역사에서도 이런 국민적인 정신운동이 반드시 선행(先行)했음을 본다. 대체로 그 과정은 정치에 능한 인물보다는 덕망이 높은 분에게 국민적 존경을 집중시키고 흩어지기보다도 모여서 더 큰 힘을 낼 수 있음을 자각하고 우렁찬 건설의 소리를 울렸던 것이다.
제二차 대전이 끝날 무렵, 「쏘메트」 공산지도자들은 저들이 꿈꾸던 구라파정복(征服)은 저절로 이뤄질 줄 생각했다. 그토록 피폐(경제적으로)한 구리파 각국이 공산화될 것은 뻔한 것으로 본 모양이다. 그러자 미국의 소위 「마샬」원조란 것이 쏟아저 들어왔다. 구라파 사람들은 참 하늘의 선물처럼 이것을 받아다가 경제부흥에 전력을 다했다. 한해 두해가 지나면서 그 부흥되는 모습은 눈에 보이듯 두드러져 가는 것이었다. 이에 당황한 것은 공산당이었다. 미제국주의가 팽창하고 있다고 선전했다. 그들이 그처럼 반대하던 「마샬」원조는 서구(西歐)를 완전히 부흥시키고야 말았다.
이것은 우리가 눈으로 본 역사의 증거인 것이다. 영국의 <더글스·하이드>씨의 말대로 공산주의는 사회악(社會惡)을 교정하려는 자가 아니라 그들은 사회악을 먹고사는 자이기 때문에 그것을 오히려 조장(助長)하고 있는 자이다. 그 때문에 그때 서구(西歐)에서 그 많은 실업자 틈에서 「마샬」원조와 같은 도의적인 원조를 반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원조를 받을 때 한편으로 공산선전을 귓전으로 그들은 이민생활을 했던가. 저들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네들은 생각하기를 우리가 남의 것을 받아서 살아가는 형편이니 경제부흥에만 이 원조를 쓰고 다른데는 일체 전용(轉用)치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러기에 그들은 이 원조로 학교건물도 짓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전시(戰時)와 다름없는 소비생활의 철저한 억제를 계속했었다.
무엇보다 존경할 만한 일은 그들은 정당정치를 한갖 정부수립에 있어 국민의 의사를 묻는 수단으로 말하자면 선거방법으로 하여 국민 스스로가 거국적이요. 강력한 정치를 기대했다. 서독국민에게 민주주의적 전통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토마스·만>의 명언이 있다. 『나는 생애를 걸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자이지만 나의 이상이 정치에 미처질 때는 아니다』라고.
우리의 「청조」 운동 및 「신생활」운동이 아직 삯트지 못한 연고는 첫째는 국민적 자각이 미흡한데 있고 둘째는 지도자들이 희망을 잃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여기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부활」 보다 더 완전한 고리가 없듯 이에 더한 벅찬 희망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날로 새로운 희망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리스도인의 목표가 현새에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처럼 처참한 현실생활에 그의 빛을 가져오기에는 또 암담한 온갖 현실을 타개하기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희망이 우리 모든 이의 마음속에 용솟을 수 있어야 하겠다.
우리는 이미 국가가 국민에게 무엇을 베풀어 주거나 하는 치졸한 바램을 걸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주의자들의 공상에 불과하다. 다만 우리 바칠 수가 있는 완전한 의무를 다할 뿐이다. 이를 떳떳한 우리의 국가 생활로 여길 뿐이다.
그러나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 된 우리로서 스스로 간택된 위치를 생각해볼 때 지금은 우리 안에서 부터라도 이런 「신생활」에 속하는 운동을 일으킬만하다. 그것은 필경 밖으로 연장시켜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방법은 우리는 너무나 많이 알고 있다. 그리스도교 노동운동이 있고 신용조합 운동이 있고 「레지오·마리에」가 있지 않는가. 이런 가톨릭·악숀을 행동(악숀)으로 옮길 때(時間)이요. 또 절실히 요구되는 곳(空間)이 어느 먼데 있지 않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한 사형수로 보였지만 미리하신 말씀대로 부활하심으로 또한 승리의 영광을 들어내셨던 것이다. 이에 더한 희망의 상징은 없다. 이 그리스도의 큰 영광과 희망을 교리로서 그리고 신앙으로서 확신하는 우리가 오늘의 현실을 구제할 「신생활」운동에 앞장을 선다면 소소한 난관에 당황치 않고 기어코 일정한 성공을 걷우고야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