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一九 「민주혁명」 한돐을 맞이했다. 문교부는 四·一九학생 「데모」가 과연 혁명이냐?하는 정의(定義)를 각계각층에 질의했다고 하거니와 비록 四·一九가 역사상에서 보는 혁명의 요소를 결(快)하고 있다할지라도 그 결과로 걷우어진 정치적 변화 즉 제二공화국을 탄생케했으며 그 헌법(憲法) 마저 갖추게 한 것인 만큼 혁명에 더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혁명중의 혁명이라 할 수 있다. 분명히 혁명이다.
혁명에 더한 것으로 보는 연고는 그것은 결코 폭력의 승리가 아니라 윤리적 승리였음에 있다. 혁명을 거뜬히 완수한 우리 학도들은 정권을 장악한 것이 아니라 학원으로 되돌아갔다. 어지러진 길바닥을 비질하고 공서(公序)를 도맡아 오히려 구정권(舊政權) 각인(各 人)의 신변을 보호했을 뿐이다. 참으로 훌륭했다.
그 때문에 우리는 四·一九의 정신적 면(面)을 높이 평가해왔으며 추잡한 정쟁(政爭)이 되살아나고 혼탁한 공기가 새로 감돌적마다 모름지기 四·一九의 순수한 정신으로 돌아 설것을 호소했었다. 四·一九의 정신적 바탕은 능히 국민정신을 안양(昻揚)케하여 하여금 건전한 에토스(ETHOS)을 형성(形成) 할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구악(舊惡)의 타성은 좀체로 일소(一掃) 될 수는 없었다. 정권(政權)과 금권(金權)에만 양심을 흐려버린 직업적 정객(政客)들은 각광을 받은양 날뛰게 되어 그들이 오랜 「레지스탕스」를 통해 구축한 국민적 신앙은 불과 일년이 못되는 동안 완전히 추락되고 말았다. 그 결과는 정치적 치졸에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로인해 사회혼란은 나날이 심각해가고 있고 기회만 있으면 언제이고 공산당과 합작할 수 있는 제三세력이 공공연하게 커가고 만 있다.
한편 국민생활은 어떤가. 봄을 등진 절양농가는 아랑곳없고 도시마다 쏟아지는 외국산 사치품이 범람하고 유흥가는 그 어느 때보다 번창해가고만 있다. 국민정신이 이같이 허술하고 그 윤리력(倫理力)이 이같이 쇠퇴한 때가 그 어느 때에 또 있었던가 하는 감(感)이 있을 뿐이다. 국가는 고사하고 사회생활마저 부정(否定)하고 있는 듯, 무책임한 행동을 노정(露呈) 시키고 있음을 본다. 거리에 나붙은 극장 선전판을 보라. 어느 여름휴가장소 같으면 모르데 양속(良俗)이 살아있는 도시생활에 있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무수히 해일 수 있는 걸인, 불구자, 또 구두닦이 마치 쓰레기 더미가 쌓이듯 사회악(社會惡)만이 누적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착잡한 현실을 박차고 나갈, 그러나 지극히 현실적인 방도를 강구해야 할 줄 안다. 그것은 곧 신생활운동으로 구현(具現)되어야 하겠다. 신생활운동이란 무슨 정책의 앞잡이가 되는 그 무엇은 아닐 것이다. 신생활운동이란 실지 생활면에 혁신을 가져오는 것이라야 하겠다.
가령, 소비생활을 철저히 줄이는 길은 무수히 있다. 복장을 간편하면서 정갈히 보일 수 있게 하는 법도 있을 것이고 음식물을 영양본위로 장만하는 법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적은데서 부터 좀 더 실질적이요. 과학적인 계량을 해나갈 때 거기서 반드시 큰 것도 떠오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생활양식은 매사에 형식적인데가 많다. 실질적이요. 내용적인 것이 못된다. 허례와 허식이 심하고 어떤 의미로서는 거기 껴눌러서 마치 스스로 속박을 받는 일이 허다한 것이다. 혹 이런 것은 재래(在來)의 유교적인 고식적 가족제도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한 것도 포함한 것이지만 해방 후 새로 생겨진 생활풍습은 오히려 전자보다 더 괴상한 것임을 본다. 그것은 쉬히 말하면 철저한 소비에 바탕을 둔 생활 태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철저히 소비하라. 그러지 않으면 국민경제에 파탄이 온다』하는 식의 경제원칙하에 있는 생활풍습 그대로인 것이다.
이의 결과로 세계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호텔, 유흥장, 사치품시장은 세울 수 있었지만 국민전반에 생생발전(生生發展)할 기반을 닦아주진 못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참으로 진지하게 이 신생활운동을 일으킬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고 하겠다. 우리는 교회안에서 부터 이런 일을 해갈 수 있다. 각 조직 각 크럽에서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룰 수 있다. 그리고 가능한 실천방안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저 「가타콤브」에서 생활하던 초대 신자들이 아마 이런 생활문제를 열심히 생각했을 것이다. 그같은 상호부조(相互扶助)의 미(美)를 맺을 수 있을 때 그같이 장(壯)한 신앙도 기룰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의 실정은 초대적 그들의 모든 정열이 오늘 이 시각에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四‧一九 한돐을 맞이한 우리의 반성은 그 정신적 바탕을 무너버리거나 망각의 계절로 흘러버리지 않도록 경고해야 하겠다.
그러나 아직은 四·一九의 감격이 우리의 가슴에 새롭다. 이런 감격을 안고서 새 생활운동에 대열을 짓게될 때 언제이고 생활한 국민정신의 기풍(氣風)으로서 살아날 수 있겠다.
위대한 국민의 역사는 정복(征服)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신생활운동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四·一九는 능히 그 정신적 바탕이 되기에 흡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