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치명선열(治命先烈)의 순교정신(殉敎精神)이야 천만대(千萬代)에 아니 무궁세(無窮世)에 빛날 천상보좌(天上寶座)의 명주(明珠)이지마는 그이들이 우리말이며 우리글이며 조차 정확무오(正確無誤)하게 썼으리라고 추어줄 수는 없다. 허기야 숭고(崇高)한 정신(精神)에 유려무애(流麗無碍)한 문장(文章)이라면야 그야말로 “범에게 날개”니까 여북 좋았으랴마는, 불행(不幸), 그렇게 겸유(兼有)치 못했음은 어쩔 수 없는 사실(事實)이다. “영신은 과연 날때나 육신은 연약”(마 二六장 四一절)하고보니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백수십년전(百數十年前) 옛날이라 식자간(識者間)에서는 저 국어(國語)의 뉴앙스를 전연무시(全然無視)한 선조명편(先祖命編) 칠서언해형(七書諺解型) 국어(國語)를 썼을터인즉 그런 분위기(雰圍氣) 속에서 생장(生長)하신 순교선열(殉敎先烈)들이 어찌 바른 국어문장(國語文章)을 쓸 수 있겠는가.
秋水는 天一色이요.
龍舸는 泛中流라
소鼔一聲에 解萬古之愁혜로다
우리도 萬民이 다리고 同樂太平하리라.
五丈原秋夜月에 어이뿔손 諸葛武候 竭忠報國타가 將星이 떠러지니
至今에 兩表忠言 못내 슬허하노라.
綠楊이 千萬絲인들 가는 春風 매여주며,
探花蜂蝶인늘 지는 꽃이어리,
아모리 사랑이 重한들 가는님을 어이리.
有馬有酒兼有金하니 素非親威强爲親을
一朝馬死黃金盡하니
親威도 反爲路上人이로다
世上에 人事變하니
그랄 슬퍼하노라.
하는 류(類)의 노래는 당시사유(當時士類)의 즐겨 읊던 노래다. 우리가 이 몇편(篇) 노래를 읊어보면 당시식자간용어(當時識者間用語)의 일반(一斑)을 엿볼 수도 있다. 이런 문학적공기(文學的空氣)를 호흡(呼吸)하신 순교선열(殉敎先烈)이신지라, 공과편찬(編纂)에 있어서도 난삽(難澁)한 한문숙어(漢文熟語)를 쓰잖을 수 없었겠고, 따라서 그 문체(文體)는 한문직역문체(漢文直譯文體)의 영향(影響)을 받잖을 수 없었겠다. “옛공과”를 뒤져보라. 한문교양(漢文敎養)이 결여(缺如)된 이로서는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한문숙어(漢文熟語)가 거의 페지마다에서 산견(散見)되지 않는가.
칠서언해(七書諺解) 말이 났으니 말이지 그는 오로지 한문직역적해석(漢文直譯的解釋)에는 충실(忠實)했지마는 국어(國語)의 고유미(固有美)는 아주 몰각(沒却)해버린 글이다. 그래도 칠서언해(七書諺解)는 당시(當時)에 있어서 제법 정통국어(正統國語)의 위세(威勢)를 부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순교선열(殉敎先烈)들도 “종천이강(從天而降)”이란 한문(漢文) 따위를 해석(解釋)함에 있어서 그 종자해석(從字解釋)에만 충실(忠實)하려니까 으례 “하날로 좇아 나려와……”로 써놓기가 일수였것다. 왜 “하늘로부터 내려와……”라 하지를 못했던고. 이따윗 조사태도(措辭態度)를 모화사상(慕華思想)의 편인(片鱗)이라 나무랄 수도 없지는 않겠다. 아마 그이들은 “하날로 좇아……”는 전아(典雅)하지마는 “하늘로부터……”는 속인(俗人)의 구조(口調)라 하여 즐겨 쓰지 않았었을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랬다면 그게 바로 탈이다. 한토(漢土) 냄새가 풍겨야만 구수하다 하니 탈이란 말이다.
(二)
그래서 나는 개종후(改宗後) “옛공과”를 펴놓고 읽을때 사십오년전(四十五年前) 서당(書堂) 구석에서 읽던 유경사서언해(儒經四書諺解)를 연상(聯想)케 되었다. 나는 “옛공과”를 읽게될 때마다 아, 이는 실로 진부(陳腐)한 문장(文章)이로구나, 졸렬(拙劣)한 문장(文章)이로구나, 되게 나무란다면 사대주의적문장(事大主義的文章_이로구나를 중얼거리곤 했다. 글쎄 이따윗 문장(文章)으로 엮어진 경본(經本)을 갖고 어떻게 현세대(現世代)의 영혼(靈魂)들이며 다음세대(世代)의 영혼(靈魂)들을 사로잡는단 말인가. 우리는 현세대(現世代)며 다음세대(世代)의 영혼(靈魂)들을 구(救)하려는 일군들이지 十八세기 중엽(中葉)의 영혼(靈魂)들을 구(救)하려는 일군들은 아니니까요.
그러하건마는 주 신부(朱神父)님께서 “옛공과”를 “우수(優秀)한 민족문화재(民族文化財)”라느니 “우아미묘(優雅美妙)의 필치(筆致)로 된 글“리아느니 하시니 원 “아기소호(阿其所好)”에도 분수가 있지…….
“우수(優秀)한 민족문화재(民族文化財)”라니까 말이지 우리나랏 가톨릭의 손으로 이뤄놓은 민족문화재(民族文化財)가 고작해야 그런 종류(種類)의 것이라면 우리나랏 문화발전(文化發展)에 기여(寄與)한 가톨릭적노작(的勞作)에 대하여 개탄(慨嘆)치 않을 수 없다. 아, 갑자기 적막감(寂寞感)이 머리를 스치는구나!
선진제국교회(先進諸國敎會)에서는 아름다운 모국어(母國語)를 고르고 골라 다듬고 다듬아 주옥(珠玉)같은 참신(斬新)한 새공과를 엮기에 예의주력(銳意注力)한다 하거늘 우리나랏 가톨릭은 고태의연(古態依然)한 또는 한문(漢文)에 예속(隸屬)되어 병신(病身)된 말로 엮어진 “옛공과”를 고대로 묵수(墨守)하고 있으니 이는 확실(確實)히 우리나랏 가톨릭의 태만(怠慢)이다.
난릉미주(蘭陵美酒)는 으례 금(金)그릇에 담는법 아닌가.
“옛공과”는 으례 “새공과”로 변모(變貌)시켜 천래(天來)의 미주(美酒)를 담을많나 금(金)그릇이 되게 해야 한다. 달리말하면 천래(天來)의 진주(眞珠)를 간직하기 위(爲)하여서는 낡은 전당(殿堂)을랑은 헐어버리고 새 전당(殿堂)을 지어야 한다. 하니까 “옛공과”는 반드시 “새공과”로 돌아와서 더욱서 새로워져야 한다는 말이다. 허나 이른바 “새공과”란 것도 말하자면 천리(千里)의 길을 가려는자(者)가 애오라지 二, 三十리지점(里地点_에 이른 셈이라고나 해둘까. 그 완전형(完全型)에 가까워지려면 전도요원(前途遙遠)하다
경위(經緯)가 그러하거늘 주신부(朱神父)님께서는 “옛공과”에 대하여 “이는 순교선열(殉敎先烈)들의 경건무쌍(敬虔無雙)한 수고와 노력(努力)의 금자탑(金字塔)”이라고 신주(神主) 모시듯 영검을 떠시니말이지, 그렇다면 그 일점일획(一點一劃)조차 신성불가침적(神聖不可侵的) 무엇이란 말인가. 주신부(朱神父)님께서는 “옛공과”를 마치 부적시(符籍視)하는 듯해서 우습고 또 참람(僭濫)하게도 거기에 Taboo 선언(宣言)조차 하는듯 하니 더욱 우습다. 이는 이승만(李承晩)이가 저 광무년간(光武年間)에 나온 프로테스탄트 선교사(宣敎師) 방커역성경(譯聖經)을 고집(固執)하고는 필경(畢境)한글파동(波動)까지를 일으키던 미련한 복고주의적태도(復古主義的態度)와도 비슷하고 일찍 아담을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대생물학자(大生物學者)라고 요란스레 외치던 프로테스탄트 목사(牧師) 이(李)○○氏의 억지춘향(春香) 이와도 비슷하다.
주신부(朱神父)님께서는 “옛공과”는 “우리말의 전통적본성질(傳統的本性質)을 남김없이 살려놓은 ”글이다 과장(誇張)했는데 그 이른바 전통적 본 성질(性質)이란 말하자면 주자학파유생(朱子學派儒生)들의 냄새 풍기는 전통(傳統)이란 것이겠지, 우리말 고유(固有)의 전통(傳統)은 아니다. 나는 가끔 할머니들에게와 할아버지들에게 공과에 씌어있는 말 특(特)히 한문숙어(漢文熟語)의 뜻을 아느냐고 묻는다.
그들의 거의 전부(全部)는 그 뜻을 모르고 그저 외라니까 욀 뿐이라고 대답하것다. 그는 그렇고 식자청년(識者靑年)에게와 식자신자(識者信者)에게도 같은 물음을 던저보았더니 역시(亦是) 겨우 十중(中) 一 · 二나 그 뜻을 아는 정도(程度)이다. 마치 옛날 선인수량(仙人修養)을 쌓으려는자(者)들이 뜻도 모르고 음부경(陰符經)을 외듯이 우리나랏 가톨릭 중 대다수(大多數)는 경문(經文)의 자구(字句) 뜻을 모르고 그야말로 그저 외라니까 외고있으니 이렇고서야 어찌 성총(聖寵)을 받을 수 있겠느냔 말이다. 우리나랏 선교인(仙敎人)들이 心生於物死於物機在目生者死之根死者生之根恩生於害害生於恩이란 음부경(陰符經)의 진의미(眞意味)를 통 모르고 외움같은 현상(現象)이 우리나랏 가톨릭세계(世界)에도 있다는 엄연(嚴然)한 사실(事實)을 무슨 수로 부인(否認)해낸단 말인가.
徐昌濟(가톨릭大學 神學部 講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