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二十九일은 세계 나환자의 날이다. 해마다 이 날을 당하면 신문들은 몇자나마 여기에 대한 기사를 실음으로, 우선 그 체면을 유지하고 관계기관에서는 고작해야 활자 아닌 사람들끼리 모여 앉아 좌담회를 해서 왈가왈부하며 소일하다가 마침내 『예산이 있어야지』라는 결론을 내리고 뿔뿔이 헤어지면 또 일년이 가고 또 같은 말을 되푸리하는 동안에 나환형제들이 마음은 인간의 모든 착한 지향을 잃고 세상과 자기와 마침내 천주까지 저주하는, 그야말로 「구할 수 없는 인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일년을 두고 몇번이더냐. 금년초에 모든 신문들은 신축년이라 해서 소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하느냐 하면 심지어 교회계통 신문마저 소 특집을 하는 소같은 친절을 짐승을 위하여 베풀었거늘, 천주의 의자, 우리의 형제들을 위하여는 눈을 가지고 입을 막아 외면하고 있지 않는가. 소만도 대접받지 못하는 형제들의 생활과 그 운명에 대하여 우리 교우가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우리 한국에는 학자마다 구구한 숫자를 발표하고 있으나 대체로 二十五년만에서 三十만의 나환자들이 각지에 산재해 있다고 봐서 큰 착오는 없을 것이다. 전 세계를 치면 실로 二천五백만의 환자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二백五十만 가량을 제하고는 이 환자들의 대부분이 아세아 지역 각국에 있다는데 우리의 관심이 더욱 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병은 낫는 병이다. 이 병을 아직도 천형(天刑)의 병, 불치의 병으로 돌리는 사람은 구 무식을 자칭하는 멸시를 면치 못할 것이다. 동병의 세계적인 학자, 불란서 「빠스더르 연구소」의 <쇼시낭> 박사는 『나병은 이미 의학의 손을 떠났다. 이제는 사회문제만 남은 것이다.』고 했다. 현대과학으로 이 병을 전치 내지 중지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一九二○년 독일의 최후의 나환자 한 사람이 자연사하므로 독일에는 현재 한 사람의 나환자도 없다. 그 외에 문명한 나라, 사회복지책이 발달한 나라에서는 이미 이런 환자를 찾아볼 수 없거나 혹은 극히 소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령 불란서에서는 一천二백명의 환자가 있다고 하지마는 전염성 환자는 한사람도 없고 생활능력이 없는 치유자 불과 八十명 정도가 수개처 수용소에서 구호를 받고 있을뿐 나머지 이류자들은 각각 일반인과 같은 생활을 자력으로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전기 <쇼시낭> 박사가 『사회문제』라고 한 것은 다른 전염병, 가령 천연두를 앓고 난 사람도 우리는 같이 한 사회에서 살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나환을 앓았던 사람은 다 싫어하여, 사회에서 용납하지 않음은 벌써 소위 건강자라고 자처하느 나자들이 나환자보다 실로 더 무서운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나환을 겁내는 무식병이라 하겠다. 우리는 이 무서운 우리 자신의 병을 먼저 고치므로 더욱더 저 불우한 나환자들과 형제로운 접촉을 하여 병고와 생활고 더구나 정망상태에 있는 정신상태를 충분히 인식하고 이해하여 더 많은 사랑을 베풀 각오를 새로이 해야할 것이다.
현재 우리 교회에서 운영하는 구라사업(救癩事業)의 실정을 살펴보면 일제시대에는 이 방면의 사업이라고는 전무하던 것이 현재에는 서울교구의 二개 수용소를 위시하여 각 교구가 다 수개소의 집단부락을 원조하고 있고 또 <수이니> 신부님의 이동진료반은 전국을 상대로 방방곡곡의 나환자 집단부락을 정기적으로 심방하여 투약 치료면을 주로 담당하고 있다. 전북교구에서는 금춘 三월을 기하여 고장본당구내의 일 환자부락을 선정하고 여기에 「센터」를 두어, 二○○명 가량의 동 부락을 가장 모범적인 부락으로 하기 위하여 불란서에 본부를 두고 있는 「경제, 인도 협조본부」의 회원들을 초청하고 지금 그 준비에 분망하고 있다는 보도에 접하고 있다. 「센터」를 두는 것을 봐, 동 교구내의 다른 수개 나환집단부락에도 동시에 구호의 손이 뻗혀질 것으로 사료되어 많은 기대를 가지게 되며 최근 이런 구호사업이 우리 교회내에서도 활발하게 태동하고 있음을 볼 때 만시지탄은 있다고 하드래도 경하하여 마지 않는 바이다. 그러나 여기서 오인은 이런 사업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반성을 촉구해 두는 바이다. 즉 전기 수개 사업처가 대부분 외국인이나 외국의 재원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동포 우리의 형제를 구하는데 가까운 우리 자신은 수수방관하고 있으면서 수만리 이방형제들이 애덕에만 맡겨놓고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도 낼 수 없다. 물질도 낼 수 없다. 더구나 한심한 일은 병고에 우는 형제들, 또 이 형제들을 볼보기 위하여 불철주야 자기 몸을 돌볼 여유도 없는 동지들을 위하여 한번 기구해 주는 일도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누구 앞에서서 『나는 교우로라』고 할 수 있느냐 묻고 싶어지는 바이다.
금년 세계나환자의날을 앞두고 병고에 신음하는 형제들을 위하여 기구하며 애긍하며 희생하는 집단적인 운동이 우리 교우들 사이에 일어나 지기를 촉구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