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에 사는, 어리고 힘없는 여자라는 죄 밖에 없었다. 강제로 혹은 속임수에 넘어가 지옥보다 더한 곳으로 끌려갔다. 인생을 송두리째 뺏겼다. 70년 가까이 가해자 일본의 망언에 시달렸다. ‘위안부’. 이 세 글자 하나하나에는 잔혹한 근현대사에 희생된 여성들의 눈물, 한, 절규가 처절하게 새겨져 있다.
지난해 12월 28일 한·일 외교장관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협상에 ‘합의’했다. “첨예하게 대립했던 과거사 문제가 마침내 해결됐다”며 정부는 의기양양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피해자 할머니들과 여론은 격분하며 합의 취소와 재협상까지 요구하고 있다. 진정으로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 할머니 총 238명 중 생존자는 단 46명. 지난해에도 9명의 할머니들이 가슴 속 한을 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일본한테 구걸하고 왔느냐, 우린 인정 못한다!”
지난해 12월 29일 오후 2시30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생활하고 있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
면담을 위해 이 곳을 방문한 조태열 외교부 2차관이 할머니 6명 앞에 머리를 숙였다. “협상 내용이 만족스럽지는 못하시겠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노력한 결과”라는 설명에도 할머니들은 조 차관의 시선을 차갑게 외면했다.
유희남(87) 할머니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법적으로 배상해달라는 것이지 돈 몇 푼 쥐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유 할머니는 분을 참지 못한 듯 말을 이었다. “그렇게 흐지부지 합의할 거면 우리를 차라리 죽게 놔두지 그랬습니까?”
김군자(요안나·89) 할머니는 “위안부 끌려가서 매를 맞아 귀가 터져서 말도 잘 못 듣고 있지만 이렇게 나는 살아있다”며 “피해자인 우리를 빼놓고 어떻게 합의했다는 말이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가슴에 맺힌 한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게 해달라”며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12월 30일 낮 12시 서울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121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 현장에서도 이 같은 분위기는 이어졌다.
참석자들은 한·일 협상의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며 졸속으로 합의된 협상을 철회할 것을 주장했다. ‘평화의 소녀상’ 주변에는 “소녀상 이전 반대”라는 구호가 적힌 피켓이 등장했다.
日 정부, 법적 책임 모호하게 비켜가
이번 합의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공식 합의문 공개도 없이 구두로만 발표된 데다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은근슬쩍 넘어갔다는 것이다.
일본 외무상은 기자회견에서 합의 발표를 통해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 하에… (중략)…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등 단체들은 “관여 수준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범죄의 주체라는 사실과 위안부 범죄의 불법성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문제는 일본 정부의 공식사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 측의 합의 발표에는 ‘아베 총리는… (중략)…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함’이라고 돼 있다. 정대협은 성명을 통해 “아베 총리가 직접 사과해야 함에도 ‘대독 사과’에 그쳤고 사과의 대상도 모호해 진정성이 담긴 사과로 볼 수 없다”고 밝혔다.
특히 ‘평화의 소녀상을 관련 단체와의 협의를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한다’는 우리 정부 합의 발표 내용도 공분을 사고 있다. 김선실(데레사) 정대협 공동대표는 “이런 조건을 받아들인 것은 되를 받기 위해 말로 줘버린 굴욕적인 외교 행태”라고 비판했다.
한국교회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폭 넓은 활동을 벌여왔다. 지난해 11월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와 본당들이 ‘의정부 평화의 소녀상’ 건립에 참여했다.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는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앞의 부지를 ‘평화의 소녀상’을 위해 내놨다. 2014년 11월에 열린 한·일 주교 교류모임에 참석했던 주교들은 ‘나눔의 집’을 방문해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한·일 정부 합의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지고 있어 한국교회로서도 새로운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입장을 내놓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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